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편
“오빠, 우리 진짜 가는 거 맞아?”
아내의 목소리가 오랜만에 상냥하게 들렸다.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 적이 거의 없었다.
생계 앞에서, 일상의 피로 앞에서, 마음의 온도는 늘 언저리에만 머물렀다.
나는 지쳐 있었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저녁, 아내는 무심코 파리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몰랐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유럽은 평생 우리와 거리가 먼 땅이 될 것 같았다. 그 결심이, 오늘로부터 정확히 6개월 전의 일이다.
“그럼 진짜 가는 거지? 나도 실감이 안 나.”
오늘, 우리는 파리로 떠난다.
아이 키만 한 분홍색 트렁크를 꺼내고, 작년 여름부터 아껴 두었던 폴로 셔츠에 면바지를 꺼내 입는다.
한껏 멋을 내보려는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내의 손길.
그 모습들 안에서, 우리의 여행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온다.
공항이라는 공간은, 어쩌면 여행보다 더 여행 같다.
내게 공항은 늘 설렘의 절반이었다.
도착보다 출발이 더 벅차오를 때가 있다.
그 설렘을 우리는 온몸으로 흡수하며, 게이트 앞으로 향했다.
하늘 위에서의 13시간은 생각보다 더 길고 더딘 여정이었다.
제주도는 1시간, 일본은 2시간, 가장 멀었던 방콕도 5시간 반이었으니,
이건 그야말로 인내였다.
“파리니까 참는다.”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버티고 또 버텼다.
오후 3시.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어색할 만큼 낯설고, 낯설 만큼 벅찼다.
“우리 진짜 파리에 온 거 맞아?”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예약된 숙소는 파리 5구.
지하철역을 향해 걸으며, 나는 오감을 열고 이 도시의 실루엣을 받아들였다.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창밖으로 스치는 장면들을 바쁘게 눈에 담았다.
“여기가 파리 시내인 거지?”
아내는 다시 물었다.
생각했던 그림과는 조금 다른,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이어졌다.
그렇게 약 한 시간쯤 지나,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지상.
그 순간, 눈앞에 동화가 펼쳐졌다!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전적인 건물들,
수수하지만 세련된 파리지앵의 걸음,
무지갯빛으로 물든 길거리 시장의 과일과 채소들,
그리고 그 풍경을 찬양하듯 기울어지는 오후 햇살까지.
완벽했다.
꿈꿔왔던 모습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오빠, 너무 예뻐 어떡해!!”
아내의 흥분된 목소리가 내 마음을 더 요동치게 했다.
“진짜 동화 속 같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심장이 쿵쿵거렸다.
진한 여유와 아름다움이 거리 곳곳을 춤추듯 지나갔고,
작은 순간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까워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우리, 진짜 파리에 온 거 맞네.”
난 이제야 아내에게 확답을 줄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시차로 생긴 여행 피로를 커피로 달래며, 검은 머리의 파리지앵이 되어 보았다.
도시에 어둠이 내려올 무렵, 우리는 에펠탑으로 향했다.
밤에 보는 에펠탑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놓칠 수 없었다.
도시가 검게 물들고, 조명이 하나씩 깨어났다.
약 10분쯤 지났을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고,
휴대전화를 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슈퍼스타가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던 바로 그 순간,
에펠탑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밤의 에펠탑은 완벽했다.
낭만, 로맨틱, 황홀함—
이 모든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조명이, 낮에는 가려졌던 에펠탑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고, 나는 멍하니 에펠탑이 뿜어내는 오색빛깔을 바라봤다.
이미 나는 파리의 일부가 되어있었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파리의 밤에 취했고,
마주 보는 서로의 얼굴에 취했다.
‘파리’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단연 <미드나잇 인 파리>다.
소설가를 꿈꾸며 파리에 방문한 남자가 자정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피카소와 헤밍웨이 같은 예술가를 만나는 이야기.
도시의 낭만과 감성이 고스란히 담긴 판타지 로맨스다. 파리가 궁금하거나, 언젠가 여행을 꿈꾼다면 꼭 챙겨볼 만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좁은 골목 작은 건물들이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도를 보며 걷던 우리는, 어느 순간 낯선 골목에서 멈춰 섰다.
숙소는 분명 가까워졌는데, 도무지 방향이 맞지 않았다.
“우리…길 잃은 거야?”
아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 짜증부터 냈을 테지만, 오늘은 '피식' 웃음이 먼저 났다.
"이런 게 여행 아니겠어?"
길을 헤맸지만, 덕분에 파리의 또 다른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오빠, 우리 파리 또 한 번 오자."
아내가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제 첫날인데 벌써? 아직 며칠이나 더 남았는데."
나는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렇게 좋은 거였으면 진작 올걸."
어린아이 같은 아내의 말투가 귀여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내도 이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로등 불에 비친 아내의 얼굴이,
5년 전 첫 만남 때 보았던 그 얼굴과 닮아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고요한 저녁.
우리의 파리는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