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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더 좋아할 군대이야기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편

by 별의서랍


“오빠…우리 그만 만나자…”

전화기에서 송곳이 튀어나온다면 이런 기분일까?
뾰족하면서도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한마디가 내 귓가에 꽂혔다.

밝고 장난기 가득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냉동고에서 막 꺼낸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입이 얼어붙어 가만히 수화기를 든 채 서 있었다.
그 어떤 말도 얼음처럼 차가워진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입대 후 1년이 지나고 날벼락 같이 찾아온 이별.
수많은 노래나 영화에서 이별을 외쳤지만, 직접 경험한 이별은 참으로 쓰라렸다.

군대에서는 ‘일말상초’라는 말이 있다.
일병이 끝나고 상병이 시작될 즘에 애인과 이별한다는 말이다.
남자친구가 입대하고 대략 1년 정도가 고비라는 얘기다.
난 그 1년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숨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천 마디 외침도 헤어지자는 한마디를 이길 수가 없구나.”

나는 터덜터덜 불 꺼진 내무실로 들어갔다. 우린 그렇게 이별했다.

그녀와 이별 후 한 달 정도는 공중전화 부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졌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사람 같았다.




통화가 허락되는 꿈같은 자유시간은 악몽으로 바뀌었고.
아침을 알리는 기상나팔소리는 그녀를 소환했다.

다행히 나는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군대라는 틀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뻔한 행복들에 만족해가고 있었다.
바로 먹는 거. 나는 이별의 아픔만큼 살이 쪘다.

군대라는 공간이 집처럼 느껴질 때쯤, 나는 2년을 채우고 만기 전역했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군 생활로 그을린 얼굴이 회복되기도 전에 그녀를 만났다.
군인 티를 벗어보고자 아끼던 박스티와 캡모자로 멋도 내봤지만 어설펐다.

“얼굴이…많이 탔네…”

“응..전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뭘..”

서로의 한 마디 한마디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의 얼굴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직장인의 성숙함이 자릴 잡고 있었다.

최근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병원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한 발짝 더 나간 걸 보니 대견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1시간 정도를 앉아있었다.

순간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봄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눈빛이 나쁘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봄을 응원해 주고 있는 걸까?

“앞으로 잘 지내고..아프지 말고..”

“응.. 오빠도 건강하게 잘 지내..”

우린 싱거운 작별 인사를 하고 그렇게 거리를 나섰다.
그녀가 혹시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가로등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내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이었다.

군시절이 생각날때면 가끔 꺼내보는 영화가 있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군대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모범적인 군 생활을 한 말년 병장 ‘태정’에게 중학교 동창인 ‘승영’이 내무반 신참으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군대라는 환경을 소재로 하지만,
군대의 부조리 뿐 아니라 과연 군대라는 공간이 한 인간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시공간을 뛰어넘어 깊이 있게 다룬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어른이 된다.”

어릴 적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씀이다.
군대를 다녀와야만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군대를 다녀와야만 사람 구실 하는 줄 알았다.
군대를 만기 전역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지는 의문이다.

물론 군대에서 배울 점들은 참 많다.
거대한 사회를 압축해 놓았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다.
엄마가 손수 해주신 따뜻한 밥 한 끼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
하나 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낀다.


연인도 친구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옹기종기 붙어살아야 빛이 나는 존재다.
한쪽만 애지중지 밝히는 빛은 거센 바람에 쉽게 꺼져버린다.

“내가 말이야…군대에 있을 때….”

오랜만에 만난 30년 친구들과 진한 술자리를 나누는 순간.
남자들은 군대라는 단어 하나로 10시간도 이야기할 수 있다.
여자들 앞에서는 최악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함께 자리한 아내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다.

내가 했던 군생활이 가장 힘들고,
내가 하고 있는 직장생활이 가장 버겁고,
내가 해야 할 집 대청소가 가장 무섭다고,

우리는 밤을 새워,
그렇게 연신 외쳐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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