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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영화 '비트' 편

by 별의서랍

“네 여자 친구가 딴 남자랑 오토바이 타고 가던데?”

대망의 수능이 끝나고, 꿈에 그리던 순간이 왔다.
그 이름도 찬란한, 술집 알바생.
술집 알바를 한다는 건, 공식적으로 술을 먹을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고,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던 술집을 내 집 드나들 듯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릴 적, 아빠 손을 잡고 호프집에 간 게 전부였는데,
이젠 그 곳에서 내가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자체가 날 설레게 했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알바를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사한 여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귄지 한 달이 채 안된 우리는 할 게 참 많았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수다도 떨어야 되고, 배고프면 맛있는 밥도 사먹어야 했다.
가끔 호프집에서 술 한 잔하며 분위기도 잡아야 했다. 그뿐인가.
금쪽같은 그녀를 만나는데 츄리닝 바람으로 나갈 수도 없다.
요즘 유행하는 멋이란 멋은 다부려야,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더 빛날 수 있으니까.




수능이 끝나자마자 알바 지원을 하고, 당당히 합격했다.

“너무 멋지다!”

여자 친구는 날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몇 일 뒤 친구와 놀러와 내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술집의 근사한 조명아래, 땀 흘리며 일하는 내 모습이, 내가 봐도 멋있었다.
여자 친구는, 그녀의 친구와 테이블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속닥거린다.
아마, 내가 너무 멋있다고 감탄하는 중일 꺼다.
술집 알바를 통해 내 주머니는 두꺼워졌고, 내 주머니는 그녀를 통해서만 얇아졌다.
역시 어른이 되니 사랑이 알아서 찾아오는구나 싶었다.

크리스마스 며칠 전, 사장님과 함께 매장에 트리를 장식하고 맘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보았다.
다행히 크리스마스이브는 사장님의 배려로 쉴 수 있었다.
이미 마음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설사 눈이 오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새하얀 미소가 눈이 돼 줄 테니까.

트리가 완성될 즘이었다.
친한 친구가 급하게 매장으로 들어왔다.

“야, 희진이가 딴 남자랑 오토바이 타고 가는 거 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감기몸살이 온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어렵사리 일을 마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아닐 거야.”

친구가 잘못 본거라 믿고 싶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희진이가 아닌,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그는 희진이 남자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도 희진이 남자친군데..”

어이가 없었다.
난 수화기 너머의 그와 만나기로 했다.
어두운 밤,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15분 정도 기다리니,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라는 직감이 들었다,

“희진이와 사귄 지 일주일 됐는데요.”

나와 마주한 그는 당당했다.
난 희진이를 그전에 만났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녀가 그의 등 뒤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안함과 당황함 그 중간쯤의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미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잠시 후 오토바이 무리가 도착하더니, 그녀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드는 밤, 거리에선 반짝이는 조명과 함께 밝은 캐롤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0년 이전 출생자 중 <비트>라는 영화를 모르는 남자는 없을 꺼다.
남자들이 유난히 열광했던 영화이자, 내 청춘의 절반을 완성해준 영화.
그 영화를 통해 담배를 배웠고, 오토바이를 동경했다.
배우 정우성의 화려했던 리즈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청춘의 방황과 일탈을 실감나게 표현한 수작이다.
그 미완성의 청춘들은 시간이 흘러, 지금은 어엿한 가장이자, 사회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미완성들이 그 자리를 속속히 채우고 있다.

“날도 추운데 뭔 오토바이를 그렇게 타고 다닐까?”

난 오토바이를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사실 예전의 그 트라우마 덕분일거다.
나의 달콤한 첫사랑을 빼앗아갔던.
나의 꿈같은 크리스마스를 강탈해갔던.

청춘이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넘어지고, 빼앗기고, 다시 넘어지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한다.
그래서 난,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너무 아팠고, 또 아팠다.

사랑하는 아내가 내 곁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하다 (자기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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