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래식' 편
나...너 좋아하는 것 같아...나랑 사귈래?
170센티의 큰 키. 찰랑거리는 머릿결. 늘씬한 각선미.
교복만 입어도 꽃이 되던 18살, 난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고 말았다.
친구가 주선한 소개팅 자리에서 난 장미 한 송이와 마주했다.
무심하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평온했던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고,
그 심장소리가 들킬까 나는 매번 마음을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부여잡은 마음은 사방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흐린 미소로 날 마주했다.
이제는 보여줘야 했다.
“오늘 저녁에 너희 집 앞 카페에서 기다릴께.”
수화기를 잡은 손이 떨렸다.
마치 큰 사고를 친 기분이었다.
“응, 이따 봐.”
그녀의 음성은 따뜻했다,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설픈 손가락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아껴둔 청바지와 체크남방을 꺼내입었다.
팔소매를 살짝 걷어 남자다움까지 추가했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서 빙글빙글 몇 바퀴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자격이 있어 보였다. 아니, 그녀가 반할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다.
“빨리 왔네?”
그녀의 밝은 목소리.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얼음잔에 콜라를 따르는 중 그녀가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우린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각자의 이야기들을 나눴고,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은 지금 우리의 것이었다.
교실에서 거북이처럼 느리던 시간은, 이 카페 안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시간이 공간에 지배당한 순간이었다.
“우리, 잠깐 나가서 공원 걸을까?”
난 무심하게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꼭 담아야 할 것이 있었다.
우리는 어느덧 공원을 다섯 바퀴나 돌았다.
공원엔 어스름이 내리고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뭔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는 표정이 분명했다.
그래, 이제는 진짜 이제는 말해야 했다.
“나 실은...너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추더니,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그녀도 원하고 있었다. 이건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거다.
“우리...오늘부터 사귈까?”
그녀는 당황함과 설레임 그 중간의 표정으로, 10초 정도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래...나도 오빠 좋아하고 있었어..”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의 답변을 상상했다.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세상의 모든 빛이 우리를 향해 있었고, 우린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따뜻한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출 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빠...나는 그냥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구라니, 지금 우리 앞에 눈부신 햇살이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라니.
친구로 지내자는 건, 그녀와 내가 길을 걸으며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서로의 눈망울에 취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바람 부는 날,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린 그 날 이후, 서로 모르는 사이를 선택했다.
그녀를 내 기억에서 조금씩 지워내는 과정은 매우 아팠다.
공부를 하다가도 아팠고, 점심을 먹다가도 아팠고, 자기 전에도 아팠다.
그러나 가장 아플 때는 아침에 눈을 뜰 때였다.
하루 종일 연고를 바르고 애써 달래던 내 마음이 새롭게 리셋 되는 기분이랄까.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아주 묘한 아픔이었다.
첫사랑 하면 생각나는 영화 <클래식>.
지혜는 우연히 본 엄마의 옛 연애편지를 통해 주희와 준하의 가슴 아픈 첫사랑을 알게 되고,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은 세월을 넘어 현재 지혜와 상민의 인연으로 이어지며, 결국 어머니가 놓친 사랑이 딸에게 운명처럼 닿아 새로운 사랑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다.
첫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진짜 좋은 영화는,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고 계속 새로운 감정들을 불러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클래식은 열 번은 봐도 그 때의 감정의 결이 매번 다르게 다가온다.
때론 풋풋하고, 때론 따뜻하고, 때론 가슴 저리다.
이게 바로 첫사랑의 힘인 걸까?
“자기는 첫사랑이 언제였어?”
드라이브를 하다, 아내가 기습질문을 한다.
“난 자기가 첫사랑이지..난 여자를 별로 안 좋아했어...”
좋아, 아주 침착하게 잘 넘어갔다.
“뭐야, 난 고등학교 때 쥬얼리샵에서 일하던 오빠가 첫사랑이었는데..”
아내는 아주 해맑은 얼굴로, 자신의 첫사랑을 자랑했다.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솔직하게 말하면 분명 삐질지도 모른다.
근데 글을 써놓고 보니, 갑자기 헷갈린다.
첫사랑은 서로가 좋아하고 이루어져야 첫사랑 아닌가?
난 첫사랑이 아닌, 짝사랑을 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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