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3의 사람들(3)

[오늘도, 사람!]

by 별체



100024. 도리가 건넨 쪽지에 적혀 있던 이 숫자도 삐삐암호인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1번방에 들어가 스크린골프를 치고 있는 도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맞춰 보라니까]

- 어떻게 알게 된 숫자인데?

[방금 사장님이 알려줌. 힌트를 주자면 10002/4]


2와 4 사이에 선을 그은 힌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조용히 입으로 소리도 내봤다. 만이...사...


- 마니 사랑해?

[정답! 자기야, 많이 사랑해♥]

- 뭐양ㅎㅎ 나동♥


도리는 대체로 과묵하고, 사랑을 직접 말로 표현하는데 서툰 애인이었지만, 카톡을 보낼 때만큼은 자신의 사랑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가끔 카톡을 대신 쳐주는 사람이 있는 건지 넌지시 물었지만, 그때마다 도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도리를 볼 때마다 나는 남자가 어쩜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거냐며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우리 오늘도 집에 들어가지 말까~?]

- ㅋㅋㅋㅋ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밤에 같이 있자는 말에 키읔만 잔뜩 보냈다. 마음이야 늘 도리와 함께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왠지 내가 너무 쉬운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아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려울 것 같다며 덧붙이려는데, 게임이 끝난 손님이 데스크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채, 핸드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계산을 하던 도중 1번방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사장님과 후코이단 사장님, 그리고 도리의 신난 목소리가 매장을 울렸다. 게임 현황을 알 수 있는 모니터를 보니, 홀인원이었다. 그들은 잠시 게임을 중단하고 데스크로 나왔다.


“이벤트 응모는 내가 혔는디, 홀인원은 왜 자네가 하는겨.”


오늘 컨디션이 좋다며 홀인원 이벤트에 응모하고, 내게 치킨을 약속했던 후코이단 사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뽈을 딱 치는 순간 느낌이 좋더라고.”


홀인원에 성공한 사람은 우리 사장님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응모함 돈 다 꺼낼까요?”


넉살 좋고 장난기 넘치는 상이는 사장님이 자신의 돈으로 30만원이나 채워 넣은 일명 미끼상품, 홀인원 이벤트 응모함을 툭툭 치며 돈을 꺼내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다 내 돈인데 뭐 하러 꺼내. 그냥 놔둬!”


사장님은 상이의 넉살이 싫지 않은 듯, 싱글벙글 웃으면서 괜히 툴툴거렸다. 역시 평소에 보던 사장님다운 행동이었다.


어찌됐건 오늘은 후코이단 사장님 대신, 우리 사장님이 치킨을 산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다. 치킨을 시키라는 사장님의 말에 나는 몹시 신이나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다. 다이어트를 이유로 저녁도 먹지 않은 내가 치킨을 먹을 생각에 들떠 있는 것을 본 상이는 어이없어했고, 사장님들과 도리는 흐뭇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남은 게임을 마저 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아야, 상이야.”


방으로 돌아가던 사장님이 갑자기 상이를 불렀다.


“네?”

“그냥 응모함에서 20만원만 꺼내자. 애엄마 갖다 줘야 쓰겄다.”


사장님의 말에 상이는 잽싸게 응모함 속 천원들을 한 움큼 꺼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이백 장을 센 상이는 그 천원 뭉치를 카운터 금고에 넣고 오만 원짜리 네 장으로 바꿔 사장님께 건넸다.


사장님은 역시 상이가 센스 있다며 칭찬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나도 상이에게 엄지를 척 들어보이고는 자리에 다시 앉아 물끄러미 1번방의 게임 모니터를 쳐다봤다.


방금 홀인원에 성공한 사장님과 퇴근 전 매장번호 뒷자리 0753의 비밀(공치러오삼)을 알려준 사모님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도리에게 100024를 알려준 것도 사장님이라고 했다.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주 다투기만 하던 그들이 삐삐로 1010235(열열히사모)를 주고받았다는 믿을 수 없던 그 과거가 어쩐지 이번에는 어렴풋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이 채워 넣은 돈이라 이득을 본 것도 아닌데, 홀인원을 했다는 이유로 사모님께 준다며 20만원을 챙기는 사장님이 왠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순식간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멍해진 상태로 치킨을 먹고는 근무를 마쳤다.


매장에서 나와 5분을 걷자, 더 이상 매장이 보이지 않았다. (비록 모두가 의심하고 있을 지라도) 공개적으로 연인 사이임을 알리지 않아 조금 거리를 두며 걷던 도리와 나는 그제야 손을 잡았다.


“오빠는 여기서 일하기 전부터 사장님 부부를 알았다고 했지?”

“응. 엄마랑 사모님이 같은 교회를 다니셔.”

“그래서 오빠는 사장님 부부를 조금 더 잘 이해하나?


젊은 시절의 사장님과 사모님이 삐삐암호로 사랑을 주고받은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나나 상이와는 달리 도리는 수월하게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두 분이 맨날 싸우는 줄만 알았는데, 아까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서.”


도리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사장님이 워낙 괄괄하시니까, 맨날 화만 내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 근데 정말 그러면 어떻게 20년을 같이 살아왔겠어.”

“그러게. 내가 보이는 것만 보고 멋대로 생각했네. 사모님이 출근까지 해서 사장님 삼시세끼 다 챙기는 거 볼 때마다 안쓰럽기만 했는데.”


“전에 사모님이 그러더라. 사장님은 자기 없으면 혼자 밥 먹을 줄도 모르고, 혼자 돌아다니지도 못한다고. 어디 가서 바람도 못 필 위인인데 사모님은 차라리 그게 나은 것 같대.”


도리의 말을 듣고 보니 어렵기만 했던 그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 이해되는 듯 했다. 오래토록 함께 해온 그들의 세월 중, 내가 본 것은 극히 일부였다. 그 일부만으로 그들 중 한 명을 동정하고, 다른 한 명을 꼰대로만 여기던 스스로가 몹시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도리는 그렇게 도망가고 싶어 말이 없어진 나의 손을 더 힘주어 잡고 말했다.


“모든 사람은 원래 다 오해하면서 살아.”


도리는 처음 내게 고백했을 때, 좋아한다는 말 대신 나를 더 많이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애매한 썸을 오가던 당시의 우리는 대화를 하며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각자가 보고 싶은 대로 상대를 마음껏 오해하며 서로의 진심을 가늠하곤 했다.


그런 상황이 길어지자 결국 도리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내 진심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더 이상 나를 오해하기는 대신 이제는 더 많이 이해하고 싶다면서. 도리의 그 말이 너무 근사해서 홀린 듯이 고백을 받았던 그 때가 떠올랐다. 이 사람의 세계는 아무래도 나보다 훨씬 넓은 게 확실했다.


“그러네.”


나는 도리를 보며 살짝 웃었다. 항상 적절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는 도리가 아무래도 점점 더 많이 좋아질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늘 진짜 집에 갈 거야? 아까 대답 안했잖아.”


내가 헤픈 것 같은 느낌과 점점 더 좋아지는 마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심하게 갈등하며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몰라.”

“자기가 말 안 해도 이젠 자기 마음 알아.”


이제는 조금 덜 오해하는 도리가 내 손을 잡고는 우리 집의 반대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의 손에서는 강제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모른 척 말없이 도리를 따라 걸으면서 슬며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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