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3의 사람들(1)

[오늘도, 사람!]

by 별체



“우리 매장 전화번호 뒷자리가 왜 0753인 줄 알아?”


모든 끼니를 집밥으로 드셔야 하는 사장님을 위해 매일 함께 출근하던 사모님은 저녁 준비를 마치고 데스크로 돌아왔다.


이제 그녀는 사장님을 포함한 직원들이 모두 식사를 마칠 때까지 비워진 데스크를 지키다가 퇴근을 할 예정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다이어트에 열과 성을 다할 때라, 저녁을 먹는 대신 사모님과 함께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있었기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셔도 상관없었지만, 사모님은 유일한 여자직원인 나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왜요?”

“공칠오삼. 공 치러 오삼이란 뜻이야. 스크린골프장은 대부분 뒷번호가 0753이야.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우라고.”


TV에서만 보던 삐삐세대의 지혜가 이런 것일까. 물론 오삼이라는 옛날 말투에 살짝 짜게 식을 뻔했지만, 각인은 제대로 됐다. 다른 무엇보다 숫자를 기억하는 것에 강한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 번호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혹시 또 다른 것은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젊은 시절 사장님과 연애할 때 주고받은 숫자들이라며 각종 삐삐 암호들을 신나게 늘어놓았다.


7942가 친구사이, 0242가 연인사이, 10288이 열이 펄펄, 982가 굿바이, 1010235가 열렬히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알려준 그녀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사모님이 알려준 번호들을 재밌어하면서 잠시 사장님 부부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봤다. 맑고 순수한 사모님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학생 자녀가 둘이나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소녀 같았고, 내가 본 40대 여성들 중 가장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꼬장꼬장하고 자주 욱하는 사장님이 삐삐로 사랑고백을 하는 모습은 좀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내가 아는 사장님은 그런 간지럽고도 로맨틱한 행동과는 몹시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장님이 그런 걸 보내셨다고요?”

“안 믿기지? 직접 받아본 나도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 때 홀딱 빠져서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사모님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졌다. 깔깔거리는 우리 앞으로 후코이단 사장님이 다가왔다.


“두 아가씨들이 뭐가 그렇게 재밌을까?”


후코이단 사장님은 사장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 스크린골프장의 오래된 단골이었다. 왜 후코이단 사장님인가 하면, 그의 게임 아이디가 후코이단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후코이단 제품 사업을 하셨기에 아이디를 그렇게 지었다.


“아휴, 내가 아가씨는 아니죠.”

“아니긴? 제수씨 어디 가서 아가씨라 해도 아무도 뭐라 못혀요.”


후코이단 사장님은 우리 매장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손님이었다. 사장님이랑 매일 붙어 다녔기 때문에 매장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았고 매너도 좋았다. 아르바이트생인 나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에게도 간식을 자주 사주고 선물도 종종 건네셨다.


한 게임당 2만원인 스크린골프를 매일 2-3게임씩 치면서 하루에 5만원이 넘는 돈을 아무렇지 않게 턱턱 냈다. 골프실력도 우리 매장에서 최상위권이었기에 매장 이름을 걸고 스크린골프 대회에도 왕왕 나가곤 했다.


대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직접 겨뤄보고 싶다며 찾아오는 경우도 많아, 매출에도 큰 기여를 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넉살까지 좋았으니 누가 그를 싫어하겠는가.


“진짜 아가씨 앞에 두고 별 얘기 다하신다니까. 오늘도 홀인원 도전하시게요?”

“두고 보랑께. 오늘 성공하면 내가 제수씨랑 이쁜이 각자 치킨 한 마리씩 뜯게 해줄테니께!”


고향이 전라도지만 서울에서 산지 오래되어 어정쩡한 사투리를 쓰고, 안 이쁜 나를 이쁜이라 부르는 센스 좋은 그는 이번에도 데스크 구석에 놓인 홀인원 이벤트 응모함에 2천 원을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응원하라며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게임룸으로 들어갔다.


반년 넘게 이곳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다면 첫 번째는 사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저 홀인원 이벤트 응모함이었다. 게임 시작 전에 응모함에 미리 2천 원을 넣은 뒤, PAR 3 홀에서 한 번에 공을 넣으면 응모함 속에 쌓인 돈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반년동안 지켜본 결과, 홀인원에 성공한 사람은 고작 다섯 명이었고, 프로들에게도 어렵다는 홀인원을 기대하며 돈을 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컨디션이 좋고 실력 좋은 단골이 가끔 넣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장님은 항상 자신의 돈 30만 원을 전부 천 원짜리로 바꿔 응모함에 쌓아두곤 했는데, 나는 이 모든 행위들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로또 한 번 사본 적 없던 터라, 행운을 노리며 응모함에 돈을 넣는 사람도 낯설었고, 거짓으로 응모함의 돈을 채워 넣는 사장님도 이상했다.


사장님은 이 응모함이 훌륭한 미끼상품이라고 했다. 이렇게 돈이 쌓여 있는 것을 본 손님들이 우리 매장을 잘나가는 매장처럼 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탕주의 성격의 사람들은 반드시 여기에 돈을 넣을 것이라고 했다.


사모님은 아무도 안 하고 매장 돈만 쓰는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게다가 돈이 너무 대놓고 보이는 게 오히려 매장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며 응모함을 없애고 싶어 했다. 그래서 종종 사장님과 다퉜지만, 언제나 승자는 목소리 크고 불같은 성격의 사장님이었다.


“정말 저 응모함 좀 없애버렸으면 좋겠어.”


응모함에 돈을 넣고 게임룸으로 들어가는 후코이단 사장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모님이 중얼거렸다. 나도 사모님의 생각에 더 많이 동의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내가 말을 거들면 두 분은 또 싸우게 될 테니까.


사장님의 저녁을 챙긴 그녀는 저 게임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서 자녀들의 저녁을 또 한 번 차려야 했다. 한번은 저녁 시간에 맞춰 사장님이 집에 다녀오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어 사모님께 넌지시 물어본 적 있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저 못난 인간 같으니라고!”


매장이 운영되는 모든 시간은 아르바이트생과 직원들이 두 명 이상씩 상주했고, 사장님 부부의 집과 매장은 걸어서 고작 5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장에서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사장님은 기어코 사모님을 9시-18시의 노동자로 만들고 말았다.


집 밖에서도 집밥만을 고집하던 사장님의 등쌀을 못 이긴 그녀는 사장님은 물론이고, 전 직원들의 식사까지 챙기는 업무를 떠맡았다.


그녀는 그런 고충을 항상 하소연했지만 나는 그녀가 만족할 만큼 호응을 하고 있는지 늘 의문이었다. 사장님도 이해가 안됐지만 그런 사장님과 매일 싸우면서도 출근해서 밥을 차리며 지금껏 같이 사는 사모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부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하는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10288을 보고 약을 사서 달려오고, 1010235를 외치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0242의 당신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젠 7942로도 보이지 않는 아슬아슬한 그들 사이에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늘의 후코이단 사장님 홀인원 성공여부를 내일의 사모님께 전해드리는 것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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