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오늘도, 사람!]

by 별체



업무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수차례 수정했다. 그러고도 혹시 빠뜨린 부분이 있을까 싶어 네 번을 다시 봤다.


퇴사하겠다는 말을 꺼낸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내 퇴사를 미룰 수도 없었기에 그동안 근무했던 내용을 하나의 문서에 최대한 꼼꼼히 남기려고 애썼다.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면서 처음 이 곳에 입사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4년간의 한의원 실장직을 내려놓고 30대가 되어서야 들어선 회사였다. 총 인원이 10명도 되지 않는 그 작은 회사의 문턱에서 나는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선보이는 곡예사 같았다.


내 자리의 전임자는 그만둔 지 이미 두 달이 지났고 인수인계서는커녕, 자신이 근무했던 1년 치의 모든 기록을 삭제한 후 퇴사했다. 설상가상으로 직속 팀장님의 자리도 공석으로 비워진 지 반 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입사 후 직속 팀장님의 자리가 채워지기까지 첫 5개월 동안 최고 결정권자와 직접 부딪히고 혼나면서 회사에 적응해 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니 매일 분노와 눈물 사이를 오가면서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이런 기억이 있는 내가 후임자에게 직접 인수인계도 하지 못한 채 퇴사를 하게 됐으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결과 무려 50페이지가 넘는 인수인계서가 탄생했다.


사회 초년생이 와도 업무처리를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려고 노력한 문서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편해질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근무한 3년이 겨우 이 정도 분량에 담길 내용은 아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일었다. 결국 내가 아니어도 조직은 어떻게든 굴러가고, 나를 대체할 사람은 언제나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겨우 인수인계서 파일을 닫았다.


“대리님, 어차피 나갈 회사인데, 무슨 인수인계서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써요?”


내가 쓴 인수인계서를 본 동료 린은 어차피 나갈 회사에 왜 좋은 일만 해주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이 자리에 앉을 누군가가 적응할 때까지 린님이 일 대신 떠맡을까 봐서요. 그런 일 생기면 이 인수인계서 보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직접 하라고 해요.”


린은 이 곳에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후임이었지만 비슷한 업종에서 일한 경력자라 일도 잘했고, 서로의 고충을 잘 이해하는 좋은 동료였다. 어찌 보면 정성스러운 인수인계서는 얼굴도 모르는 후임자보다는 린을 포함한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내 자리를 채울 누군가가 회사에 적응하는 동안, 나의 동료로 지냈던 이들에게 최대한 적게 민폐 끼쳤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란 문서. 그 모든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은 게 내겐 인수인계서였다.


린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나는 그런 린을 보며 인수인계서 파일을 다시 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핀 후에야 안도하며 파일을 닫았다. 이제 퇴사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이 생각났다.


내가 일한 곳은 정보보호 관련 협회 사무국이었다. 사무국 인원은 적었지만 협회다 보니 그동안 교류하고 지낸 회원사 담당자들이 너무 많았다. 각 기업의 정보보호 담당자들을 일일이 찾아뵐 수도 없는 건 물론이고, 협회 사무국 직원이 퇴사한다고 직접 만나 인사드리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코로나라는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대부분 이메일로 퇴사 소식을 알렸다.


이 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낌없이 지원해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는 인사와 함께 퇴사 이후에도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달라는 이메일을 100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답장을 주셨는데, 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글에서도 묻어나오는 그들의 성향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모든 자리에서 친절하게 ‘대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이 곳에서 근무하기 전 나는 대응이라는 단어를 주로 뉴스에서 들었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한다던지, 코로나에 대응하는 프로세스라던지 말이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는 어느새 그 단어가 자연스러워졌다.


협회에서 근무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정보보호, 사이버보안 관련 분야에서 근무하는 담당자였다. 이들은 항상 해킹, 취약점에 ‘대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고 읽는 문서에서 대응이라는 단어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어떤 일이나 사태에 맞추어 행동을 취한다는 그 말이 재밌으면서도 혹시 내가 그들의 요청에 대응만 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어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라 자연스럽게 나온 것을 알기에 더 깊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딜 가시더라도 ‘인증’ 받으실 듯합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인증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절반이 정보보호 관련 내용이다. 개인정보가 중요해지고 정보보호의 중요성이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받아야 하는 인증도 최근 몇 년간 부쩍 늘어났다. 확실히 이 세계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였다. 사람에게 인증이라는 단어를 붙인 그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대리님 덕분에 이 협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인재를 잃은 협회에게는 안타깝지만 훌륭한 인재를 얻는 행운을 잡은 기업이 생기겠네요.'


다시는 회사를 다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안간힘을 쓰면서 퇴사를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에 와 닿는 퇴사 인사였다. 회사에 속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까. 단 두 문장으로 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격려한 세련된 응원에 감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말을 건넨 담당자는 협회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나와 잦은 교류가 있었기에 더 고마웠다.


훌륭한 인재를 얻는 행운을 잡은 기업은 퇴사 후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없지만, 나는 그들이 건넨 마음속에서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고 있다.


물론 회사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벗어나니 나를 증명하는 일조차 쉽지 않아 후회할 때도 많지만 울타리 속에서 배운 것들을 잘 쓰면서 신나게 걷고 있다.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 많은 분들에게 감사했고 앞으로도 더 감사하면서 당분간 씩씩하게 걸어보려 한다. 응원해준 당신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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