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사모님을 배웅한 뒤 데스크로 돌아오자 매장 저쪽에서 띠링 소리가 났다. 세탁기가 자신의 일을 마쳤다는 신호였다.
오후 2시에 출근하자마자 빈 방을 돌며 깨진 공이 있는지 확인하고, 세척이 필요한 공을 따로 골라 세탁기에 넣어뒀다. 양이 많지 않아 며칠 더 모은 후 세척하려고 그냥 놔뒀는데 사모님이 저녁 준비하면서 세탁기를 돌린 모양이었다.
세탁이 끝난 공은 꺼내서 마른행주로 물기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장 주방에 놓인 세탁기 쪽으로 가려는데, 저녁식사를 마친 도리가 자신이 꺼내가겠다며 그냥 앉아 있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일했고, 도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했다. 오후 5시부터 마감시간까지는 상이와 수가 있었다. 중간 시간에 일하는 나는 그들 모두와 함께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오빠들이었던 셋은 나를 귀여워했고, 내가 일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많은 부분을 배려했다. 그 중 도리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애인이기도 했다.
공을 꺼내온 도리는 데스크 내 옆자리에 앉아 목장갑을 끼고 공을 닦기 시작했다.
“이리 줘. 오빠는 지금 근무 시간 아니잖아.”
도리의 근무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지만, 그는 10시에 끝나는 애인 때문에 거의 매일 자진해서 매장에 남았다. 그는 일을 돕기도 하고, 그냥 데스크에 앉아 있기도 했다. 손님이 거의 없을 때는 빈 방에 들어가 골프 연습을 하기도 했다.
대학생 때까지 운동선수였던 도리는 골프에도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우리 사장님과 후코이단 사장님도 그에게 적극적으로 골프를 추천하며 자세를 봐주고 같이 게임을 치기도 했다.
“괜찮아. 내가 할게.”
“오늘은 먼저 들어가도 돼. 내가 애도 아니고.”
도리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슬쩍 던졌다. 나 때문에 하루 종일 매장에 있는 그에게 무척이나 미안했지만, 나는 그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이 마냥 좋은 어리광쟁이 연인이었다.
“괜찮아.”
도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했지만, 목장갑을 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손을 툭툭 치고는 남은 공을 마저 닦았다. 그는 대체로 말이 적은 편이었지만, 행동에서 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사람이었다. 나는 도리의 그런 점이 무척이나 좋았기에 그의 연인이 됐다.
언제나 묵묵히 책임감 있게 일하는 도리는 사장님과 사모님의 총애를 받는 직원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 했고, 상대방의 기분을 금세 알아차리고 맞춰 행동하는 데 탁월했다.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도 도리 덕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주로 말을 건네기보다는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묵묵히 돕거나, 나 모르게 자신이 대신 일을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무언가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그의 배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내가 도리의 애인이 된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형, 말해 봐요. 솔직히 둘이 사귀죠?”
게임이 끝난 방을 치우고 데스크로 돌아온 상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상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도리보다는 두 살 어렸다. 상이도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면서 성실하기까지 했기에 매장의 모두가 좋아하는 직원이었다.
사장님 부부는 스크린골프장을 운영하면서 도리와 상이를 포함한 지금의 구성원들이 가장 만족스럽다며 자주 칭찬하곤 했다.
“그런 거 아냐. 인마.”
“이쁜아, 진짜 아냐?”
“이쁜이라고 하지 말랬지?”
“왜애~ 후코이단 사장님이 맨날 이쁜이라고 부르잖아. 나쁜 말도 아닌데 뭐 어떠냐?”
“아, 하지 마. 능글맞아 보여.”
자연스럽게 대답을 피하면서도 이쁜이라는 호칭에 질색하는 나를 보며 도리와 상이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이내 상이는 도리의 옆에 앉아 함께 공을 닦기 시작했다.
매장 사람들에게는 도리와 내가 연인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우선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 아직 두 달밖에 안됐기 때문이고, 사장님이 알게 되면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도리와 나의 행동들 덕분에 상이를 포함한 모두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을 것이었다.
도리가 매일 서너 시간씩 늦게 퇴근을 했다면, 나는 도리를 빨리 보고 싶어 갖가지 핑계를 대며 한두 시간씩 일찍 출근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사장님 부부도 언제부턴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거기에 도리는 근무 시간동안 나를 데스크에서 꼼짝도 못 하게 했고, 움직이는 모든 일들은 자신이 다 도맡아서 했다.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하면서도 사귄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밀이 잘 지켜지고 있다며 안심했다.
“오빠들, 7942가 뭔지 알아?”
나의 물음에 상이가 먼저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뭔데? 너의 시급?”
“친구사이. 옛날 삐삐 암호래.”
“크크, 그게 뭐야. 그래서 둘이 친구 사이라고?”
다시 시작된 상이의 질문에 괜한 말을 꺼냈다 싶었다. 나는 슬쩍 도리의 눈치를 봤지만, 도리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그냥 아까 사모님이 알려 준거야. 사장님이 사모님이랑 연애할 때 삐삐암호 많이 보냈대. 믿겨져?”
“삐삐 암호 또 뭐 있는데?”
“1010235.”
“그건 또 뭐야?”
“숫자 그대로 읽으면 열열이삼오. 열렬히 사모한다는 뜻.”
“...... 진짜?”
도리와 상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사모님께 보였던 반응과 똑같았다.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사장님이 사모님에게 그런 암호를 보내는 장면은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듯 했다. 잠시 흐른 침묵을 깬 건 말없이 대화를 듣던 도리였다.
“그래서 두 분이 결혼하셨겠지.”
나는 도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모님이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려던 찰나에 후코이단 사장님이 도리를 불렀다.
“도리야, 너 근무시간 끝난 거 아니냐? 나 오늘 홀인원 이벤트 응모혔다. 할 일 없으면 이리 와서 나 치는 거 응원 좀 혀라.”
도리는 나와 상이에게 웃으며 눈짓하고는 게임룸으로 들어갔다. 남은 상이와 나도 갑자기 밀려드는 손님 덕분에 대화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로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후코이단 사장님이 들어간 1번방을 살피며 스코어를 살폈다.
함께 플레이하는 우리 사장님과 도리의 성적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이제 곧 홀인원을 할 수 있는 PAR 3 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도리가 잠시 게임룸에서 나왔다. 상이는 다른 방을 치우러 갔기에 데스크에는 나 혼자 뿐이었는데, 도리가 슬쩍 작은 쪽지를 건넸다.
“혼자 몰래 봐.”
할 말이 있으면 카톡을 보내면 되는데, 왜 쪽지를 썼을까 궁금해서 도리를 쳐다봤다. 도리는 그냥 쪽지를 보라며 손짓한 후 다시 게임룸으로 들어갔다. 쪽지를 펼쳐보니 알 수 없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00024.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