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자주 듣던 말 중 하나는 '우리 막내는 뒤통수가 납작한 아이라서 예뻐'라는 말이었다. 뒤통수가 납작해서 예쁘다니? 어이가 없겠지만, 우리 집에서 그 말은 어른들이 바라는 '순한 아이'라는 뜻 정도로 쓰였다. 나는 신생아 시절,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 순한 이이였다고 한다. 엄마는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젖을 물렸다는 무용담을 자주 들려주셨다. 그때의 난 순했지만 지금의 고집은 있었던지 내 뒤통수의 납작함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엄마는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누워있던 적이 없던 유난스러운 첫째 딸은 아주 예쁜 뒤통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막내딸이 어렸을 때 순한 아이여서 몸은 편했지만, 그 이후로 내내 마음은 불편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마음만으로 충분하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 드는 생각이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여전히 내 뒤통수는 너무나 납작하다.
납작한 뒤통수라 예쁘다는 말이 뒤통수가 납작해서 예뻤다는 과거지향적인 말로 차츰 바뀌어가던 사춘기 무렵 나는 내 납작한 뒤통수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사실 나는 순한 아이가 아니라 순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아이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강박증을 가지게 하는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하고 순했던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지만, 어느 한순간도 착해야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그 시절의 울분이 현재의 나를 화가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을거다. 내 생각에 나는 타인보다 훨씬 과거의 일을 더많이 기억하는 사람이다.
예전에 지인의 집에 방문했을 때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아이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엔 그 여자아이의 할머니로 보이는 분이 계셨는데, 자신의 손주는 어른에게 인사를 잘해 예쁘다며 칭찬을 한참 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게 더 안전하다고 교육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낯선 장소에서 안면식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특히 상황 판단이 어려운 어린아이들의 경우엔 더 그렇다.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하는 장면을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아는 사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은 어릴 적의 기억은 잊거나 생각이 바뀌는 게 대부분이다. 앞서 본 그 나이 대 사람들이 손주가 아닌 자식에게도 같은 교육을 했을 테지만, 처음 보는 낯선 어른이 내게 인사하는 것을 난 본적이 없다. 그런 위험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왜 그 아이는 누구에게나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야 할까
내가 내 어린 시절에 가장 후회되는 점은 그저 착한 아이였다는 점이다.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나는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착한 아이, 말 잘듣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누구나 후회를 가지고 살지만 그 후회는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선택이 어려운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과 원하는 것, 또 자신이 이뤄내지 못한 것을 내 아이에게 투영하며 강요하기도 한다.그들의 바람은 당장은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부모들이 바라는대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아이로 사는 시간보다 어른으로 사는 시간이 더 많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