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내 생일 즈음이었나. 눈이 많이 내렸어. 3월,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무릎보다 더 높이 눈이 쌓인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어. 눈이 그친 뒤, 사람들은 길에 나와서 집 앞의 눈을 한쪽으로 쌓아 두었는데, 쌓인 눈이 담벼락만큼 높았어. 그리고 그날, 우리 집 마당엔 눈으로 만든 그럴듯한 성이 생겼어. 그리고, 난 독한 감기에 걸렸지. 나는 왜 하루 종일 그걸 만들었을까. 그런 게 추억일까? 참 이상하지. 온통 싫은 기억뿐인 그 집에서도 단 하나의 좋은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니 말이야.
보통 좋은 기억만 있다가 나쁜 기억하나에 정 떨어지는 게 사람 마음인데, 나는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며 그 집에 살았던 시간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어. 그곳에 너와의 시간이 있어서 그런가.
사람이 기억력이 너무 좋으면 힘든가 봐.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이 나서, 정작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잊어버리곤 하니까. 너와 처음 만난 날, 마지막으로 만난 날 네가 입었던 옷까지 자세히 기억이 나서, 넌 꿈에서도 여전히 그날의 옷을 입고 있어. 그래서 꿈속의 너는 한 겨울 추위에도 여전히 반팔 차림이야. 내 기억 속의 너는 여전히 그날에 멈춰서, 겨울이 왔는데도, 너는 계절에 맞는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어.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는데 이전의 나는 얼마나 많은 업을 쌓았을까. 하지만, 가장 힘든 건 너겠지. 기억해 주길 원치 않는 사람이 이토록 오래 기억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잖아. 너는 영영 잊힐 권리를 잃었지.
언젠가 다시 3월에 눈이 오면, 나는 멋진 성을 쌓고, 그걸 무너뜨릴 거야. 그러면 너는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날 수 있겠지. 내내 나와의 안 좋은 기억이었어도, 어쩌면 단 하나의 기억이 너에게 추억이 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