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약속 장소에서 승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승호는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습니다.
승호: 윤아야, 많이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해.
윤아: 요즘 계속 약속에 늦네. 무슨 일 있어?
승호: 미안해… 근데 너도 지난번에 늦은 적 있었잖아. 그땐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윤아: 그래서 지금 그걸 핑계로 대는 거야?
승호: 아, 그런 건 아니고… 예전에 너의 지각을 그냥 넘어간 걸 기억해 달란 거야.
윤아: 난 그때 너처럼 핑계 대지 않고 계속 사과했거든? 상황이 다르지 않니?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나빠 잠시 말없이 걸었습니다.
승호는 약속에 조금 늦는 것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느긋한 성격이었지만, 윤아는 만약의 상황을 미리 대비하는 철저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승호는 윤아가 늦었을 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윤아는 승호의 반복된 지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승호는 윤아의 태도에 서운하기도 하여도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윤아도 승호의 태도에 화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승호는 윤아의 슬픈 얼굴을 보고 자신의 기분보다 윤아가 더 신경 쓰였습니다. 승호는 윤아가 걱정되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승호: 윤아야, 내가 잘못해 놓고 말실수까지 했네. 진심으로 미안해.
윤아: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시간 딱 맞춰 오려고 하지 말고, 20분 일찍 도착하게 나오라고. 이건 약속시간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필요한 생활이야.
승호: 사실 오늘도 정각에 맞춰 오려다 늦었어. 내가 원래 좀 느긋한 편이잖아. 너도 내 성격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윤아: 서로 사귀다 보면, 당연히 서로의 생각이나 방식을 따라주길 바라게 되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너의 느긋한 성격과 내 꼼꼼한 성격이 하나가 되긴 매우 어렵거든.
승호: 맞아. 그냥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더 이상 서운할 일은 없을 텐데, 자꾸 네가 나와 같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
윤아: 가까운 사이일수록 성격이나 생각이 같아지길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문제는 그 기대가 어느새 강요가 된다는 거지.
승호: 맞아, 내 느긋한 성격을 이해해 주길 바란 것도 강요에 꽤 가까워진 것 같아.
윤아: 나도 마찬가지야. 내 방식대로 움직이라고 네게 대놓고 강요했지. 맞는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강요할 순 없으니까.
승호: 친구 사이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텐데, 애인 사이라 그런지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잘 안 돼. 게다가 서로 생각을 터놓고 얘기하다 보니 사소한 것도 다툼으로 번지는 것 같아.
윤아: 애인 사이가 이런데, 더 가까운 가족 관계는 다툴 일이 더 많겠지?
승호: 애인이나 가족 사이에 다툼이 생기는 건 생활력이 부족하거나 매너가 나쁠 때가 많겠지만,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때가 훨씬 더 많아.
윤아: 그런데 상대방을 일부러 괴롭히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잖아. 어떤 때는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강요하는 것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요받는 건 괴롭고. 이래저래 복잡한 문제라서 해결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다투고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것을 피할 수는 없나 봐.
승호: 혹시 ‘가슴에 대못이 박혔다’라는 말 들어봤어?
윤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걸 뜻하지 않아?
승호: 응, 함께 지내다 보면 좋은 기억도 쌓이고 나쁜 기억도 쌓이지. 문제는 다툼으로 인한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는 거야.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마음속에 더 많이 쌓이게 돼.
윤아: 확실히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더 오래가긴 해. 아 참, 내 친구 하윤이가 남자친구와 소소한 문제로 꾸준히 다투더니 결국 헤어진 게 생각나네.
승호: 네 친구처럼 작은 다툼이 꾸준히 쌓이든 큰 다툼이 갑자기 생기든 인간관계로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다면 마치 큰 못이 몸에 박힌 것처럼 매우 오래 남게 돼.
윤아: 그럼, 인간관계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다고 해서 점점 좋아지기보단 반대로 더 나빠지기 쉬운 거겠네.
승호: 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상대에게 상처 줄 일이 없어서 오래되었다고 사이가 좀처럼 나빠지진 않아. 주로 서로 매우 가까운 사이가 그렇게 되기 쉽지. 주변에 보면 그렇잖아. 사귀고 헤어지지 않는 커플보다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커플이 훨씬 많잖아?
윤아: 물론 오래될수록 더 사이좋게 지내는 커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구나. 나는 애인 사이라면 다툼이 있어도 좀처럼 헤어지지 않을 줄 알았어.
승호: 네 친구 하윤이도 결국 그랬다면서?
윤아: 그건 그 친구만의 일인 줄 알았지.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승호: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우리 둘 사이를 굉장히 두터운 사이라고 생각했단 거지. 실제로 애인 사이는 몇 번 다퉜다고 쉽게 끝나버리는 가벼운 사이가 절대 아니야. 적당히 밀어도 튕겨 나가지 않고, 멀어졌어도 당기면 금세 다가와. 흔히 말하는 밀당이 되지. 하지만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나쁜 기억이 계속 쌓여 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어.
윤아: 그렇게 쌓여 버린 나쁜 기억이 자기 사랑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사귀는 관계가 끝나는 거겠지.
승호: 마치 큰 통에 물을 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윤아: 그게 무슨 말이야?
승호: 사람마다 상대방과의 나쁜 기억을 담는 통이 있다고 상상해 봐.
친구라 써진 통은 크기가 보통이고, 애인이라 써진 통은 크기가 상당히 커. 그 통에 상대방에 대한 나쁜 기억이 꽉 차면 그 사람과의 관계도 끝나는 거지.
윤아: 그럴듯하네. 서로의 관계가 끝나지 않으려면 통의 크기를 늘리거나 나쁜 기억이 쌓이는 걸 줄여야겠네?
승호: 그렇지. 그 통의 크기를 키우려면 자신의 참을성과 포용력을 키워야 해. 그건 너무 어려워. 결국 통에 나쁜 기억이 쌓이는 걸 최대한 줄이는 게 가장 좋아.
윤아: 휴지통을 매우 크게 만들고 쓰레기를 잔뜩 넣는 것보다 쓰레기를 덜 만드는 게 나은 것처럼? 쓰레기를 많이 만들어서 딱히 좋을 건 없으니까.
승호: 그냥 통보다 쓰레기통 비유가 더 좋네, 아무튼 다투고 생긴 나쁜 기억을 최대한 작게 만들려면 ‘감정싸움’을 ‘사랑싸움’으로 바꿔야 해.
윤아: 그건 또 뭐야?
승호: 자기 잘못이든 상대 잘못이든 다툼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야. 상대방의 작은 잘못이라도 내 감정이 크게 나쁘면 다투게 되고, 상대방의 큰 잘못이라도 내 감정이 나쁘지 않으면 다투지 않지. 이처럼 감정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을 ‘감정싸움’이라고 해.
윤아: 그러면 사랑싸움은 뭐야?
승호: 말 그대로 사랑 때문에 다투는 거야.
윤아: 사랑 때문에 다툴 수가 있어?
승호: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사귀는 여자에게 좋은 선물을 하려고 위험한 일을 하게 되었어. 그걸 알게 된 여자는 남자에게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했어. 둘은 서로 고집을 부리다 다투게 되었지. 뭐, 이런 식으로 사랑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을 ‘사랑싸움’이라 볼 수 있어.
윤아: 서로를 걱정하다가 다투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까.
승호: 다툼이 생기면 서로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감정싸움이 시작돼. 둘의 사이가 동시에 멀어지지. 물론 화해한다면 멀어진 사이가 다시 가까워지겠지만, 감정이 나빠진 상황에서 화해하는 일이 쉽니?
윤아: 당연히 어렵지.
승호: 화해라는 게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야. 너는 두 사람이 화해하려면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윤아: 아무래도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야겠지. 하나, 둘, 셋 하고 동시에 다가갈 수는 없으니까.
승호: 그게 핵심이야. 누군가 먼저 다가가는 거.
윤아: 꼭 누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풀려서 저절로 화해가 될 때도 있잖아?
승호: 맞아, 흔히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화해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 준 순간이 있었을 거야. 다만 자신이 기억을 못 할 뿐이지.
윤아: 어쨌든 잘못한 사람이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거 아니야?
승호: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그렇지만, 애인 사이는 조금 달라. 먼저 잘못한 사람도 미안한 마음뿐 아니라 상대가 자기 잘못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먼저 다가가기 어려울 때가 있거든. 게다가 상대방이 그 잘못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상대가 먼저 다가갈 수도 있고.
윤아: 결국 상대방을 더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거네.
승호: 응. 먼저 다가가는 이유는 잘못이 커서도, 성격이 활발해서도 아니고, 사랑이 더 크기 때문이지. 자기 기분보다 상대가 더 걱정되니까 먼저 손을 내미는 거야. 서로 다투고 나서 누가 더 상대를 많이 걱정하고 사랑하는지 대결하는 게 다투고 나서의 사랑싸움이야.
윤아: 다툼의 시작은 감정싸움이지만, 마무리는 사랑싸움으로 하라는 거네.
승호: 나이스. 감정싸움을 하면 나쁜 기억이 무조건 쌓이지만, 그걸 사랑싸움으로 바꾸면 그 나쁜 기억이 매우 작아져. 그러면 마음속 상처가 크게 자라지 않으니까 사랑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돼.
윤아: 음, 화해가 잘 됐든 안 됐든 사랑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겠네. 그렇다면 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해? 벌칙이라도 있어?
승호: 벌칙은 아니지만, 진 사람은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책임이 있어. ‘상대방이 먼저 다가온 것’은 상대의 사랑이 내 사랑보다 더 컸다는 의미라는 걸 꼭 잊지 말아야 해.
윤아: 하긴, 먼저 다가온 사람의 사랑이 자기 사랑보다 크다는 것을 모르거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자기가 상대방보다 위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승호: 상대방이 명백히 큰 잘못을 했다면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면 상대방이 먼저 다가온 것의 의미를 꼭 알아야 해.
윤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우리 다투고 네가 먼저 다가왔네? 이거 지금 전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승호: 헤헷, 들켰나? 아무튼 내가 이겼다. 어서 패배를 인정하시죠.
윤아: 다음엔 내가 이길 거야!
승호는 다음 약속부턴 10분 일찍 도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분 일찍 오는 것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기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서로 다투고 나면 가장 먼저 자신의 기분이 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상함보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더 걱정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상대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자기감정에만 갇혀서 먼저 다가가지 못한 점을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우위로 여겨 안심하거나, 상대를 더욱 자기 뜻대로 하려 한다면 두 사람에게 남는 것은 이별뿐입니다.
사귐은 서로 사랑이지, 짝사랑이 아닙니다. 애인 사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느끼고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자꾸 살펴봐야 합니다. 특별히 사랑싸움은 서로의 마음과 사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다툼이 있을 때마다 꼭 감정싸움을 사랑싸움으로 바꿔야 좋습니다. 게다가 사랑싸움은 패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연인 관계뿐 아니라 가족, 친구 및 다양한 인간관계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다투고 나서 사랑싸움만 잘 되어도 많은 다툼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큰 다툼이 있다면 화해의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화해를 잘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