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호와 윤아가 함께 길을 걷고 있을 때 윤아는 고등학교 남자 동창 민규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윤아: 어머, 민규야!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민규: 윤아야? 와, 이게 몇 년 만이야.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야?
윤아: 아, 그냥 아는 친구야.
승호: …
민규: 그래? 아쉽지만 나 지금 약속 있어서 가봐야 해. 조만간 동창회 한다니까 그때 보자.
윤아: 잘 가.
승호는 윤아가 자신을 ‘아는 친구’라고 한 말에 잠시 멍해졌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윤아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승호: 내가 아는 친구라고?
윤아: 아…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승호: 내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아니면 민규라는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거야?
윤아: 사실 고등학생 때 민규를 좋아했었어. 사귄 건 아니었지만… 그런 기억 때문에 나도 모르게 너를 애인이라고 소개하지 못했나 봐. 정말 미안해.
승호: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우리 사이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이 사건은 사랑싸움으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승호는 그날 윤아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 두 사람은 공원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승호: 너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그렇다면 민규한테 가도 돼. 대신 우리 관계는 정리하고 가. 나랑 걔를 동시에 만나는 건 안 돼.
윤아: 나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민규랑 처음 만났어. 너랑 사귀면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 적도 없고. 그날은 실수로 말이 헛나온 것뿐이야. 널 부끄럽게 생각한 것도 아니고, 민규랑 잘해볼 마음도 없었어.
승호: 그래?
윤아: 솔직히 좀 억울해.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너한테 이별 통보에 가까운 심각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승호: 여전히 사과할 마음이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고. 혹시 내가 이런 문제까지 다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윤아: 나 울 거야.
승호: 원래 사람은 자기 잘못이 확실해도 사과하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까 네가 자꾸 변명만 하고, 울면서 회피하려고만 하고.
윤아: …
승호: 내가 널 용서해주고 싶어도 네가 제대로 사과를 안 하니까 나도 곤란해. 사과를 안 했는데 용서를 먼저 해 줄 순 없잖아?
윤아: 사과하는 게 어렵단 말이야. 특히 큰 잘못을 했을 때는 상대방이 용서 안 해줄까 봐 두렵고, 그게 아니어도 너무 미안해서 입이 잘 안 떨어지기도 해.
승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못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사과만큼은 어려워도 해야만 해. 남이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니까. 만약 네 친구 민규가 네 핸드폰을 망가뜨렸다고 치자. 민규가 아니라 민규 엄마가 와서 사과하면 민규를 용서할 수 있겠어?
윤아: 아니, 민규 엄마가 사과하는 건 싫어. 민규가 직접 나에게 사과해야지.
승호: 그렇지. 사과는 부담이 커도 본인이 직접 해야 해. 대신해 주는 전문가나 도우미가 없다고. 당근마켓 앱에서 도움 요청할 때도 ‘사과 대신 해주기’는 한 번도 못 봤어. 그리고 작은 다툼은 사랑싸움으로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지만, 큰 잘못은 잘못한 쪽이 확실히 먼저 다가와 사과하고 상대가 용서해 주는 화해가 꼭 필요해.
윤아: 그런데, 나 나름 사과하려 했던 거 아니야?
승호: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을 보면 “말이 헛나왔어”, “나 억울해”, “나 울 거야”였잖아?
윤아: 내가 봐도 조금 변명처럼 들리네. 그래도 나름 사과의 의미가 담겨있는 걸로 봐주면 안 될까?
승호: 아직 사과하기에 대해 잘 모르네. 잘 들어. 사과하는 건 복잡하지 않아. 딱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
윤아: 그게 뭔데?
승호: 자신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기만 하면 돼. 말의 시작을 “내가”가 아니라 “네가”로 시작하면 돼. 네가 했던 말들은 “내가 실수했어”, “내가 슬퍼”였잖아. 이걸 “너”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아예 바꿔봐.
윤아: 알았어. “네 마음이 많이 아팠겠구나, 내 잘못 때문에”, “네가 받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네가 원하던 전기면도기를 사줄게.”
승호: 오우, 굉장히 제대로 된 사과였다. 거봐! 쉽잖아. 딱히 외울 것도 연습할 것도 없어. 상황을 설명하느라 변명을 잔뜩 늘어놓는 것보다, 그저 상대방 입장에서 미안함을 표현하고 책임지는 방법을 말하면 돼.
윤아: 알겠어.
승호: 그리고 사과할 때는 말로만 하지 말고 방금처럼 돈이나 선물을 함께 준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해. 너무 쉽게 사과하면 부담이 없으니까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기 쉬워. 상대방도 진심의 사과로 느끼기 어렵고.
윤아: 알겠어.
승호: 특히 애인 사이의 다툼에선 상대방의 아픔을 걱정하는 마음이 꽤 있어서 모르는 사람과의 다툼보다 사과하기가 더 쉬운 편이야. 그래서 애인 사이에 사과하지 않고 어물쩍 넘기는 건 쉬운 일조차 하지 않는 거라서 문제가 돼. 자기 잘못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전기면도기를 사준다고 생각해 봐. 아깝잖아. 하지만 나에게 사주는 건 그리 아깝지 않잖아?
윤아: 아까워...
승호: 크흠, 어쨌든 네가 진심으로 사과했으니 이제 내가 용서할 차례야. 만약 네가 말로만 미안하다고 했다면 난 아마 용서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진심이 부족한 사과를 내가 용서할 필요는 없으니까.
윤아: 만약 그렇게 됐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해?
승호: 나중에 적당할 때 다시 사과를 해야지. 정성을 들여서. 하지만 웬만하면 상대방이 사과했을 때 용서하는 게 좋아. 용서하고 사건을 마무리해야 사과한 사람이나 사과받은 사람이나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우리 모두를 위해 네 잘못을 용서할게.
윤아: 그런데 이거 연인 사이의 화해라기보다는 선생님이 학생이 가르치는 느낌이 들어. 기분 탓인가? 승호: 내 친구 중 한 명이 네가 말한 민규를 안다고 해서 이야기해 봤는데, 민규 걔 애인이 있다더라. 곧 결혼도 한다던데?
윤아: 뭐야? 그걸 알면서 처음에 나에게 그렇게 말한 거야? 민규가 좋으면 걔한테 가라고?
승호: 네가 잘생긴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아서 너의 마음을 확인해야 했었어.
윤아: 화해한 후에는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자꾸 화가 나지?
승호: 혹시 전기면도기 대신 핸드폰으로 바꾸면 안 될까?
윤아: 아, 진짜!
살면서 어려운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을 받거나 인간관계를 망치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지 못하면 큰 비난을 받고 인간관계를 망치기도 합니다. 사과는 어려운 일이기에 자주 연습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사소한 실수에도 일일이 사과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용서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의 손해가 더 커지고 약해진 관계를 회복하지도 못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에 집착하며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오래도록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음을 기억하며, 상대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면서 나쁜 일을 정리해 나가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서로 다투면 관계가 약해지지만,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로 화해하면 오히려 관계가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서로 원수가 되기도, 절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다툼의 문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보다 ‘그 일을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애인 사이는 결국 이별이나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과연 앞으로 승호와 윤아는 어떤 사이가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