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by 바다숲

글쓰기 선생님께 요즘 분노에 사로잡혀 글을 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시에 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읽으면 마음이 순해지고, 착해지는 그런 시를 배우며 악마에게 영혼을 내어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시엄마가 악귀에 들렸다고 생각했다. 몇 주전 아주버님 댁에 갔다. 이사 후 첫 방문이라 재물복을 가져온다는 멋진 그림도 미리 택배로 선물하고, 기차역에서 시엄마와 만나 택시에서 흐린 날씨와 달리 재잘재잘 즐겁기만 했다.

오랜만이고 어려운 자리인지라 긴장한 채로 열심히 식사준비를 도왔다. 칠칠치 못하게 집에선 하지도 않는 실수를 연발하며 식사를 마친 후 형님이 말리는 걸 우겨서 설거지를 했다. 어느샌가 옆에 오신 시엄마가 말했다.

“너는 평소에도 설거지하고 물을 잘 안 닦더라.”

민망해서 혀를 쑥 내밀었다. 걸레질할 때도 지적은 계속되었다.

“여기 머리카락 그대로 있다. 여기 부스러기 안 닦였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첫날, 시엄마가 먼저 잠드시고 형님이 찬장에서 위스키를 2병이나 꺼내고, 혼합주를 만들었다. 파티하듯 웃고 떠들다가 술에 약한 남편과 아주버님이 먼저 들어가고 나와 형님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놀러 가고 싶다는 희망을 여러 차례 내비치신 시엄마를 생각해서 제주도로 여행 가자는 얘기도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늦게 잔 터라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 시엄마가 방에 들어왔다.

“나 화장해야 하는데 네가 자고 있어서 못 들어왔다.”

“네가 계속 자고 있어서 밥 차리라고 말을 못 했다.”

형님도 아직 기상 전인데 남의 부엌에서 밥을 차리라는 건가? 싶어 의아했다. 빨리 밥 차리라고 하셔서 머리가 젖은 채로 주방으로 향하려는데, 대뜸 뒤에 대고 말씀하셨다.

“나 시계 사줘라.”

방금 전까지 늦잠 잔다고 구박하다 갑자기?

“네?”

“나 시계 사주라고.” 다시 큰소리로 말씀하신다.

“어떤 스타일이요?"

하며 내 시계를 풀어 보여드리니 고개를 저으시곤

“이건 별로고 금색으로 사줘라.” 하신다.

동네 어깨형님에게 삥 뜯기는 기분이었지만, 그래, 시계야 뭐 사드릴 수 있지 하며 넘겼다.

둘째 날 저녁도 시엄마는 일찍 잠드시고 우리끼리 마셨고, 형님은 미리 시엄마에게 아침에 누룽지를 데워드시라고 말했다. 시엄마는 형님을 어려워하신다.

전날 눈치가 보였던 지라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알람을 맞추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남편이 와서 시엄마와 함께 편의점에 가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해서 안심을 했다. 그런데 또 배가 고프시다 해서 누룽지를 찾아 끓여드렸다. 시엄마는 소파에 앉은 남편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남편이 냉장고에 커피 있다고 하길래 먹으며 소파에 앉는데 시엄마가 누운채로 조용히 질책했다.

“커피를 너만 먹냐? 다섯 개 사 오지 그랬냐.”

나는 황당해서 눈만 끔뻑이다가 말했다.

“제가 사 온 게 아닌데요.”

분명 아침에 아들과 함께 나가 커피를 세 개 사서 샌드위치랑 함께 먹고, 남은 하나를 나에게 준 것을 알고 계실 터였다. 지금 막 일어난 나에게 그러시는 게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어제도 여쭤봤는데요. 형님네는 집에서 내린 커피만 드신대요.”

“그래도 사 왔어야지. 에이그.”


안 그래도 눈치 보이는데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잠시 나가서 땡볕에 걷다가 돌아왔지만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집에 와서 몇 주 동안 그 일을 생각했다. 형님이 했던 말도 자꾸 떠올랐다.

“나, 동서 영업직인줄 알았잖아. 영업직이 아주 딱이야.”

첨엔 내 직업을 잘 못 아신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한테 ‘걔(나를 지칭하는 말)는 영업 뛰잖아. 맨날 어머니한테 실실 웃고 살갑게 굴고, 나는 그런 거 절대 못하잖아.’라고 말했다는 얘길 듣고서야 나를 까는 뜻인 줄을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기운이 쪽 빠졌다. 시엄마는 무시하고 형님은 나를 매도했다... 가지가 싫더라도 가족이니, 좋은 점 하나에 매달려 진심으로 좋아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아. 나 참 바보 같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나 참 잘했는데. 좋은 건 좋은 거고 나쁜 건 나쁜 거였다.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럴 사람도 없었다. 엄마한테 전화하면 분명히 네가 다 참고 내려놓으라는 불심만 강조하실 테고, 절친한 친구는 멀어졌다. 외딴섬에 고립된 듯 외로웠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도록 눈뜨고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인상을 썼다. 전처럼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다정한 말을 들려주고 진심으로 들어주고 웃을 자신이 없어 전화하지 않았다. 영업직이라는 형님 말도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시간이 지나면 시엄마가 알아채고 “우리 며느리가 뭐 서운한 거 있니?” 하고 물어봐 줄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되려 나 같은 시엄마가 어디 있냐, 나 외로운데 왜 전화하지 않느냐는 질책이 남편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 말을 전하는 것, 그리고 아주버님 댁에서 침묵한 것, 남편도 꼴 보기가 싫었다. 사람이 외딴섬이라는 건 감상이 아닌 진실이었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고,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 며칠째 분노하다가 깨달았다.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닌데, 현상보다 분노가 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왜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지? 오은영 박사가 상담 중에 “자, 그렇다면 어린 시절로 한 번 돌아가봅시다.” 하는 것처럼, 어린 날의 상처는 사십 줄이 된 지금도 자꾸 건드려진다. 엄마의 부족하다는 메시지와 질책, 언니만을 향한 칭찬. 그로 인한 자격지심은 지금도 칭찬받고 인정받으려 과도하게 애쓰는 것으로 결핍을 드러낸다. 계획대로 인정받는다면 문제없어 보이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늘 좋은 평가만 받을 순 없다. 가벼운 무시 한 번에 파사삭 깨져버리는 살얼음 멘탈이다. 사랑받고 싶으니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억울함은 커진다.


이글거리는 분노가 나를 삼켜버리기 전에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지. 마음이 불편하지만, 욕먹을까 겁도 나지만. 무심하기 짝이 없는 상대에게 다가가 내 맘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겠다. 일부러 독하게 굴지도 않겠다. 시처럼 순해지자. 순하면 호구되는 게 세상의 이치라 해도 다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겠다. 어두운 먹구름도 불이 난 곳에선 희망의 물줄기가 될 수 있다.


콧물이 멈추지 않고 열이 오른다.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마음이 상한거다. 멀어진 친구, 악귀들린 시댁, 맘 약한 남편, 당연하게 받으려고만 드는 가족들..하나같이 다 화를 돋운다. 저녁무렵 태양이 붉게 지며 사방팔방으로 빛을 뻗치고 있다. 타오르는 빛처럼 분노가 이쪽저쪽 뻗치다 결국 내쪽을 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여리고 여린 나를 천천히 쓰담쓰담한다. 어깨를 토닥여준다.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잘 살아왔다. 나는 무조건 잘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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