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동갑이다. 생일이 3개월 빠른 남편은 “노처녀 구제해줬다”라고 큰 소리 땅땅 치지만 누가 봐도 남편의 나이를 두세 살 더 본다. 머리
숱 때문이다. 선을 보는 자리에서는 남편의 반질반질한 넓은 이마가 후덕과 지의 상징으로 보이더니 나이 마흔이 넘고부터는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이마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남편은 탈모의 진행을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이란 단어는 남편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만나기 전,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사람과 맞선을 본 적이 있다. 30대 초반임에도 심각한 탈모를 겪고 있던 상대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조용함’이었다. 키는 180을 훌쩍 뛰어넘어 농구선수 감이었지만 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신중함이 지배적인 인상이었다. 나는 조용한 사람과 대화를 이끌어 갈 자신이 있었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뿔싸! 조용한 인상의 상대는 두 번째 데이트를 동물원이 있는 어린이 대공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진행했다. 나름 신중한 데이트 기획이었겠지만 나는 굽 높은 구두로 경사진 대공원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꼼짝 않고 하품을 쩍 쩍 해대며 오수를 즐기는 동물들이 부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 같으면 ‘하이힐을 신어 오래 걷는 게 불편하다’고 데이트 기획을 바꿀 수도 있으련만 그때는 나 역시 키 작은 단점을 만회하고자 억지춘향으로 신은 하이힐 형편을 고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바탕 혼이 나자 조용함과 신중함이라고 판단했던 것들이 상대에 대한 배려 부족이라는 결론으로 바뀌게 되었다.
몇 년 전, 남편의 탈모로 가발과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심각한 탈모가 주는 제1 스트레스가 이성과의 테이트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이야 기술이 많이 좋아졌지만 몇십 년 전의 가발로는 탈모의 고민을 다 지울 수 없었기에 데이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탈모남들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그때의 대공원 데이트를 헤아려 보게 되었다. 아마도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서 대화가 끓기는 어색함을 감출 수 있는 것으로 산책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 데이트 기획이었을 것이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자신감 부족’, 이것이 그에게서 느낀 결정적인 인상이었다면 남편은 탈모에 관계없는 자신감男이었다.
키 작은 내가 하이힐로 불편한 걸음을 감수하는 것과는 달리 아담한 키의 남편은 굽 없는 단화를 즐겨 신었다. ‘편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맘에 드는 디자인이면 여자 신발도 가리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싶은자신감이었는데 나이 50이 넘은 어느 날 ‘머리 펌을 해볼까’했을 때는 이제는 남편의 자신감에 제동을 걸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키는 작지만 남부럽지 않은 넉넉한 두상을 가진 남편의 머릿속에 머리 펌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남편과 비슷한 키의 김정운 박사가 뽀글 머리로 진행하는 TV프로를 넋 놓고 보던 내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참 잘 나가던 때에 사표를 내고 휴테크를 강조하며 그림 공부로 인생 2막을 시작한 김 교수의 멋짐을 내가 부러워하고 있을 때, 남편은 ‘잘 놀아야 성공한다’는 그의 주장을 이미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는 그의 저서를 배꼽을 잡아가며 읽어낸 남편 앞에 책 제목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명예퇴직이었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에 청춘을 바쳤던 청년은 한 직장에서 강산이 3번 변하는 세월을 보낸 후 문 닫는 회사와 함께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됐다. 나는 남편의 명예퇴직을 정년퇴직으로 이해했다. 정년까지는 3년이 채 남지 않기도 했고 한 직장에서 즐겁게 살아낸 시간들의 성실함은 ‘정년퇴직’이라 이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성실히 일한 만큼 자주 떠나기도 했던 남편에게 ‘떠나라’는 조언보다는 다른 적절한 선물이 있을 거 같았다. ‘36년간의 직장인’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남편에게 인생 2막을 격려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내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모발이식이었다.
한 지인이 모발이식으로 인상이 업그레이드된 것을 보고 남편에게 이식을 권한 적이 있었다. 망설이고 있던 남편은 때마침 퇴직기념으로 떠난 여행에서 유명 모발이식 의사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이식의 청신호를 열었다. 아들의 모발이식 명성을 홍보하는 말들이 우리 부부에게는 ‘반질반질한 넓은 이마에서 떠나라’는 소리로 들렸다. 의사는 보호자인 나에게 남자의 젊음은 ‘헤어와 복부’라 선언하며 모발이식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피력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불룩한 배를 트레이드 마크로 유지해 온 남편에게 복부의 변화는 불가능할 터였다. 모발이식만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처럼 나이를 거슬러 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식이 이루어지는 네다섯 시간을 수술 방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자니 온갖 생각들이 지나갔다. 의사는 시술이 이루어지는 동안 쇼핑이라도 하고 오라고 권했지만 나는 점심도 거르고 꼬박 시술 장소를 지켰다. 그것이 수천 번 두피를 찔릴 남편에 대한 의리라 여겼다. 남편은 본시 통증 세포 발달이 덜 되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코 골고 잘 자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수술 중에도 자장면을 먹고 올 정도로 슈퍼 낙관 맨 인 남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마침내 긴 시간을 견딘 남편이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나타났다. 마치 머리 수술을 받은 외상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흠씬 두들겨 맞은 권투선수처럼 붓기가 얼굴 쪽으로 내려오면서 모발이식의 현장체험을 극명하게 나타냈다.
모발이식은 본인의 머리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다른 이의 모발로도 이식이 가능했다면 숱 적은 내 머리카락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을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남편의 뒷 머리카락 6천 모가 반질반질한 이마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키 작은 모발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남편의 이마는 새싹 돋는 봄날의 성지 같았다.
모발이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첫 번째 반응은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이사한 모발들은 자신의 뿌리를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남기고 서서히 모든 흔적을 감춰버렸다. 마치 동면과도 같은 침묵이었다. 몇 개월 동안 이식에 대한 어떤 실감도 하지 못했다. ‘이제나 저제나’하며 머리를 바라보던 관심이 줄어들 무렵, 남편의 머리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발들이 갸웃하고 하나 둘 고개를 내민 것이다. 이사한 모발들의 좋은 땅 심사가 끝난 것이다. 동면을 마친 모발들이 완전히 터를 잡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모발이식은 더하기가 아닌 나누기라고 한다. 제 몸 안에서 필요한 곳으로 나누어 준다. 여타의 장기 이식과는 달리 스스로의 몸 안에서 주고받는 것이 이루어지는 셈이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의 적절함이 돋보인다. 옮겨온 모발들이 자리를 잡자 반질반질한 이마의 영역은 다소 줄어들고 ‘젊음’이라고 불러도 좋은 유쾌한 자신감이 자리를 넓혀갔다. 가끔은 남편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지만 제2의 인생을 여는 남편에게 첫 환영인사를 해 준 모발들에게 심심한 우정을 느낀다.
“그래, 지금껏 뒤통수에서 남편을 밀고 갔다면 이제는 앞에서 힘차게 남편을 이끌고 가 주렴.” 머리 염색을 해 줄 때마다 이제는 당당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남편의 앞머리에 살짝살짝 격려 멘트를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