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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준 교훈, '인생은 아름다워'

by 안나

“나 독후감 쓰면서 몇 번이나 울었어”

아침 기도를 시작하기 전 남편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본당의 독후감 공모에 글을 써 보라는 권유를 하던 때였다. “본당의 평신도 대표로 있는 신자가 마땅히 참여해야 되지 않겠냐”고 독후감 쓰기를 권유했지만 마감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남편이 글을 쓰리라는 기대는 내려놓고 있던 터였다.


본당에서는 11월 위령 성월을 맞아 ‘어머니의 죽음(H. 뉴엔, 성바오로 출판사)’이라는 책을 통해 각자의 죽음을 묵상해볼 것을 안내하고 있었다. 남편은 글을 쓰며 8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고 있었다.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황망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때, 표현하지 못했던 슬픔과 회한의 감정이 남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남편에게 글쓰기를 권했던 것은 내가 경험한 글쓰기의 긍정적인 감정들을 남편도 경험했으면 하는 희망에서였다. 남편의 독후감을 보며 나 역시도 어머니께 드렸던 약속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아들 테오필로에게 잘하고 살께요.” 진정성이 부족해서는 아니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그 약속을 자주 잊고 살았다.

사라져 가는 옛일을 회상하는데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 ‘과거’라는 이름을 가진 것들이 현재시간으로 소환되어 나란히 줄을 선다. 얼마 전 시작한 에세이 모임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선상에 서는 일이 잦아졌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이 현재의 시선으로 재해석되고 미래를 ‘희망’이라는 시간으로 재구성하게 해 준다.


말에 대해 후회하곤 했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낭비한 시간으로 힘이 빠질 무렵 에세이 모임의 글쓰기를 만났다. 어떤 글이든 쓰고 나면 후회가 없었다. 나를 들여다보고, 떠다니는 생각의 조각들을 모으다 보면 뾰족했던 감정들이 무던하게 다듬어졌다.


20년 가까이 종교단체에서 취재 봉사를 하며 짧은 기사들을 써오긴 했으니 글쓰기가 처음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육하원칙에 맞춘 압축된 글쓰기에 건조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나에게 집중하는 글쓰기는 순간적인 몰입도를 높여주는 매력이 있었다. 펜을 들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다 보면 잡다한 감정들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깊은 대화를 한 듯 감정의 정화를 느꼈다.


지나간 시간들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도 생겼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어 상처가 되었던 일들도 유머러스한 에피소드가 되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의 제목을 빌려와 결론짓고 싶은 일들을 ‘유쾌하게 바라보기’라는 테마로 써 나갔다. 글쓰기를 하며 글 읽기의 몰입도도 높아졌다. 쓰기와는 동전의 양면 격인 ‘읽기’에 집중하게 되면서 읽기가 글쓰기의 촉매 역할을 해줬다.

남편에게 큰 소리 칠 일도 생겼다. 글쓰기에 관심 없는 남편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자신만의 원고를 마련한다. 본당의 평신도 대표로 주일마다 공지사항을 전달하기 위한 원고이다. 정보 위주 전달이지만 나름 원고를 마련해보라고 조언했던 터라 관심 있게 보게 된다. 아무리 짧은 원고라도 여기저기 고치고 싶은 곳이 보인다.


사실 나는 글쓰기보다 글 다듬기가 더 재미있다. 이것은 처음 화장을 시작했을 때 느끼는 재미와 비슷하다. 얼굴 화장에서는 헤어스타일과 눈썹이 얼굴 전체 이미지를 좌우한다고 한다. 글쓰기에서의 헤어스타일과 눈썹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문장의 주어 술어 관계를 살피고 긴 문장들을 나누고 불필요한 단어를 빼도록 조언한다. 어설픈 글 화장인 셈이다. 처음엔 나의 글 참견을 극구 부인하던 남편도 이제는 글 조언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글 다듬기는 아니었지만 결혼 전 친정아버지의 육성 원고도 듣고 조언해 드렸었다. 아버지도 사목회장을 하셨다. 평신도 주일에 강론을 하기 위한 원고를 녹음해서 들어보라고 주시곤 했는데 글로 오는 것이 아니어서 말의 속도나 고저장단 정도를 살피는 정도였다. 게다가 성경에도 교리에도 문외한이었던 나는 강론 내용을 이해하기에도 벅찼다.

남편이 평신도 대표가 되고 보니 대를 이은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DNA가 한 고개를 넘어 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 남편의 원고를 보며 아버지의 녹음 원고를 들었던 때의 시간들이 회상되고 미래에 또다시 회고할 소중한 추억을 저금하는 기분이 든다.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아버지와 남편을 조금은 더 가깝게 만났다. 신앙의 결이 다른 두 개의 원고가 시대를 달리하며 내 앞에 있었다. 글쓰기는 나에게 시대와 시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튼튼한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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