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 남편, 매화 아내

by 안나

“난초시네요.”


꽃 이야기가 아니다. 남편이 연수회에서 받은 사군자 기질검사 결과이다. 매화, 국화, 난초, 대나무로 유형을 구분하는 기질검사는 사군자의 특성대로 기질을 설명해줘서 이해하기 쉬웠다. 10년 전 검사에서 나는 매화 기질, 이번 검사에서 남편은 난초 기질 검사결과로 받았다.


사군자는 사계절과 연관(매화는 봄, 난초 여름 ,국화 가을, 대나무 겨울)되어 있다. 초봄에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매화는 사군자 중 유일하게 열매를 맺는다. 매화기질이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눈에 보이는 결실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 모든것을 철저히 준비하지만 매화꽃이 잠시 만개하듯 결과를 누리는 것은 약하다. 평생을 준비하다 인생 다 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준비로 살아오며 허덕거렸던 나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설명이었다. 게다가 법과 규칙, 질서를 존중하고 보수적이며 안정을 추구한다는 매화 기질 설명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반면에 난초 유형은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자연 속에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사는 난초의 특성이 자유를 갈망하는 난초기질에 연결된다. 게다가 난초는‘난을 친다’라는 말처럼 뿌리 끝에서 잎 끝까지 한 번에 그린다. 한 번에 몰아서 일하는 ‘인생한방’ 난초 스타일을 잘 설명해준다. 인생이 축제인양 삶이 재미있다니, 난초 남편을 설명해 주는 말로 더 정확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술자리, 웃음 자리가 늘 기본이니 세상을 초 긍정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낙천적 기질은 풍요로운 계절인 여름, 여름꽃인 난초와 닮았다.

나와 남편을 한 때 개미와 베짱이로 비유했던 나는 그래도 난초 기질이 ‘현재를 살며 실제적인 목표에 빠르다’는 설명에서는 남편에 대한 핵심 메시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연수를 받은 40명 중에 난초는 나하고 한 명 더해서 두 명뿐이었어”

남편 말에 나는 크흑! 웃음이 나왔다.

“여보, 난초는 교육받는 걸 싫어해. 아마도 나 같은 매화만 있었을 걸. 나머지 한 명 난초도 밀려서 교육에 왔을 거야”

그래도 다른 난초와 의기투합해서 잘 지내고 왔다니 다행이었다.


나는 결혼 전 7년의 직장생활 이후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적이 없다. 근무지였던 ‘성당 부속 유치원’의 특성상 드라마 ‘미생’을 치열하게 경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비교적 온실 속 화초처럼 직장생활을 마친 셈이었다. 그래도 그 7년이 나에게는 늘 버겁기만 했다. 지나고 보니 매화 기질이기에 느끼는 피곤함이 많았다.


남편은 첫 직장에서 정년을 마쳤다. 33년을 한 직장에서 지냈으니 자유를 중시하는 난초 기질상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러나 바로 그 자유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아무래도 난초 유형의 수많은 특성 중에서 실제적인 목표에 빠르다는 부분에 매진한 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번은 “다른 부서에서 진급을 조건으로 오라고 하는 데 나는 지금 사무실이 좋아. 내 뒤에 상사가 아무도 없거든. 지금 이 자리가 최고야.”하며 진급을 마다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진급이 중요한 거 아닌가?”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난초 기질의 장점을 최고조로 발휘한 때였다. 남편은 시어머니 상사 없는 사무실에서 자유를 누리며 정년을 마쳤다. 삶의 만족도가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것도 기질대로 유연하게 삶에 대처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에게 성당 사목회장 제안이 왔을 때 나는 한 마디로 반대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다는 매화 기질의 신자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임감이 강한 매화 기질 신자는 사목회장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더 컸다. 남편은 열심히 해 보겠노라고 했다. 난초 기질의 자유분방함을 30년 넘게 경험했던 나로서는 마음의 온도가 늘 정신과 몸까지 지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식으로 체험한 지 오래다.


나는 이제 매화 기질을 졸업하고 싶다. 기질 상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데 체력도 마음의 근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던 차에 남편이 신자 대표를 맡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매화 기질을 더 발휘하게 되었다. 뜨문뜨문하던 기도도, 며칠을 건너뛰던 성경 읽기도 “사목회장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로 교정(?) 할 수 있게 되었다. 잔소리가 많아지고 다른 사람의 일에 과도하게 관여하는 매화 기질의 역기능이 발휘된 것이다. 남편 입장에서는 잔소리 폭발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신자들에게 인사 잘하라는 잔소리는 할 필요가 없었다. 난초 기질은 친구에게 건네는 인사는 적성이니까. 제일 많이 한 잔소리는 공지사항 짧게 하라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지사항 원고를 준비해야 한다고도 했다. 과한 준비가 일상인 매화 아내가 난초 남편의 자유를 침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저녁이면 여전히 술을 마시지만 이젠 커피도 즐겨 마신다. 커피 좋아하는 본당 신부님 덕에 커피 마니아가 됐다. 재미있는 인생이 상식인 난초 남편에게 커피도 상식이 됐다. 커피 마시는 시간만큼 술 마시는 시간이 줄어들면 좋겠지만 축제를 사는 난초 기질상 어려운 일이다. 축제에 술이 빠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래도 실제적인 목표에 빠르다는 기질의 특성은 귀가시간이 일정해지는 것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난초기질뿐 아니라 부부의리라는 기질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사군자 이론에 의하면 각 기질은 결점을 보완해 주는 상대기질이 있다. 다음 계절 기질 유형을 만나는 것이다. 봄 매화기질인 나는 나는 다음 계절인 여름 난초 유형을 만나 즐겁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 행복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운 좋게 나는 난초 남편을 만나 눈앞에 행동 모델을 두고 있는 셈이다. 이 이론대로라면 난초 남편은 가을 국화 기질을 만나야 하는데 거꾸로 봄 매화 아내를 만나 잔소리 소나기를 평생 맞게 됐다.


요즘 나는 매화의 역기능을 생각하고 잔소리를 줄였다. 이제껏 참소리라고 했던 주장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난초 남편이 잘 사는게 내가 잘 사는 길이 되니까. 그래도 몇 줄 안 되는 난초의 자유스러운 공지사항 원고는 매화의 꼼꼼한 원고로 바꾼다. 매화도 살고 난초도 사는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난초 남편 덕에 매화 아내의 몸값은 올라간다.


이쯤에서 나의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결혼 생활 내내 장가 잘 갔다는 남편 동창의 말이 명언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시집 잘 갔다는 여고 동창들의 말이 참 말이라고.


나이가 드니 좀 현명해지나 보다.


사군자 기질 설명은 한국기질검사연구소의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사진 : 묵란-이하응 (간송미술문화재단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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