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음 Jun 05. 2023

희미해지는 경계에서 나의 선을 만드는 일

백수의 항해일지

 국민취업제도 상담사님은 아주 가끔 만났고 깊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이 저물고 여위어가는 취준의 시간에서 누군가는 나의 취업을 독려하고 돕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힘이 났다. 마지막 대면 상담에서는 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도 피었다.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에는 드문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받은 도움들에 조금은 든든해진 마음으로 상담을 마무리했다.


 다양한 구직 프로그램에 참여해 본다면 직업상담사로서 일하기 전, 직접 경험으로써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호기로움과는 다르게 며칠을 알아보고 고민하다가 용기 내 상담신청을 했다. 나는 어느새 집 밖을 나오는 일조차도 여러 번 마음을 먹어야만 하는 작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상담사님에게 나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지,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일정을 잡고 구직 서류를 메일로 보내고 상담실 문 앞에서까지 나는 막연함이라는 답답한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실제 상담 신청을 하는 것은 적극적 도움 요청의 수신호인 듯하다. 염려했던 것과는 다른게 나는 서서히 자신을 나열하여 흩뿌렸다. 상담사님은 이삭을 줍듯 나의 말들을 경청해 담으셨다. 나의 상태를 다시 정리하시고 필요한 부분에는 지시적인 요소로 도움을 주셨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은 얼마나 달라지는지. 누군가에게 구직에 관한 이런 구체적인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던가 떠올려보니 단연 귀한 기회였다. 지금 다시 그려보면 상담사님과 공감과 정리 사이를 오고 가며 대화로써 열심히 밭을 재정비하는, 마치 두 명의 농부 같았다. 모쪼록 이 씨앗이 잘 자라기를.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상담사님이 하신 말씀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눈이 부신 밖을 바라보게 했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도움을 주는 일." 


 상담사님이 스치듯 말씀하신 그 시선은 내가 선택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과연 내가 바라던 시선과 마음가짐이다. 나는 작은 빛을 소중히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직업상담사가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고, 일하는 곳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처음에는 와닿지 않았었다. 그 말은 구체적인 취업처를 탐색하면서 알 수 있었다. 상담 이후 이전에 갖고 있던 막연함은 채워지고 새로운 빈칸들이 생겨나길 반복했다. 그럴 때면 멈칫하며 서성거리기 일쑤였는데 행동하기로 결심하고, 움직이자는 다짐의 글(이전 글)을 곱씹어보면 서서히 앞으로 나아갈 때인 것이다. 한숨보다는 심호흡을 하고, 용기 내 보기로 한다. 


 처음 직업상담사에 흥미가 생기고 공부를 시작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하는 것이었다. 직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직업이 아니어도 돈을 벌 수도 있고, 직업 외적 측면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직업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직업상담사의 일이라면, 이런 생각을 가진 나는 어떻게 사람들을 상담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의문에 빠져있지 않다. 직업상담사란, 직업을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담자의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거나 의사결정 능력을 함양시켜 주기 위한 역할도 수행한다. 직업, 진로 선택뿐만 아니라, 적응과 은퇴 설계 등 생애 다양한 갈래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최근 2030층이 비경제활동인구가 되어간다는 뉴스 기사를 봤다. 자발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구를 비경제활동인구라고 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경력직 위주의 채용 등 얼어붙은 취업시장의 여파였다. 지금껏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잠시 멈추거나 이후의 과정 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복합적인 이유일 것이다. 사실 나도 이 통계에 이바지하고 있는 중인지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더욱 생각한다. 방향성에 대해. 


 사회가 만든 경계를 따라 헐떡이다 멈추고 행복이란 당근을 등에 단 채 달리는 나를 보았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고 최승자 시인이 말했던가. 내 나이가 그즈음에 매달려 있던가, 떠올려보지만 그 이유만으로 이곳에 이르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한다. 방향성에 대해. 나이를 떠나 세상의 선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고 나의 선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가 온다. 자신이 그려온 발자국을 돌아보고, 앞으로 그리고 싶은 발자국을 떠올릴 때가. 

 다시 나는 생각하고. 방향을 바라보고. 걷는다. 쓴다. 주춤거리더라도 나아간다. 그려본다. 항해한다.

 답이 없다는 것은 과정만으로 괜찮다는 말과 같은 소리를 내지 않나.

이전 10화 일어나자 움직이자 걷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