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항해일지
생각이 많은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상태의 변화가 없으니 이 장막을 뚫기 위한 소리에 이끌렸다. 책을 찾아 서성이고, 상담을 받고, 단기 특강도 신청해 들어보고, 자소서를 썼다 지우길 반복하고, 공고를 검색해 보고. 꽤나 부지런해 보이지만 무엇하나 명확함을 안겨주는 것은 없었다.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다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새어나가길 반복했다. 이런 날이 지속되자, 하루는 자꾸만 좌초되고 마음은 자꾸만 고개 숙였다.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몸을, 하루를, 마음을, 일상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행동과 실천을 촉발할 수 있는 문장들을 감자 캐듯 주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릿속의 회로를 가동하는 이유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고 행동과 삶의 의미를 형태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헤아리려 할수록 늪으로 빠졌다.
책【『열두 발자국』_정재승 】
알고 보니 우리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추구하면서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때가 많다고 한다. 뇌에서는 과거 경험이나 사건들을 비롯한 기억을 느낌으로 남기기도 하기 때문에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뇌영역에서 저장하지 못한 정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의 영역이 된다. 의사결정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주도권을 갖는 경우가 많고 비합리적이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클수록,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에 반감이 있을수록 신중함이란 방패를 들고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다. 과연, 나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웠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의사결정이란, 적절한 시기에 의사결정한 후 빠르게 실행에 옮기고,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끊임없이 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최고의 선택이란 없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비교하고 고민할수록 추가적 정보에 따른 선택지는 늘어가고, 성공에 대한 욕심에 목마르고, 신중했던 만큼 번복을 자제하고자 했다. 말 그대로 결정의 늪이었고, 점점 점도를 높여갔다.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인생의 노잼시기가 온 것인가. 무슨 일이든 따분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행동의 의미를 그려보니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마침 그즈음, 서울시에서 대피 재난문자가 오발령 난 아침이었다. 잠시지만 이유 없는 대피문자와 사이렌, 안내 방송, 긴장돼 보이는 앵커의 보도에 정말 전쟁이 났나 싶었다. 가만히 뉴스를 들여다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스치고 한편으로는 그래,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휴전국 국민으로서 경각심은 살짝 눈 뜬 듯했지만, 의미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책【『무의미한 날들을 위한 철학』_프랑크 마르텔라 】
그러다가 손에 든 책이었다. 답이 있을 거라 기대하고 든 것이 아니었으나 책을 읽고 무의미의 체기가 내려갔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주의 기원 같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경험에서 시작하라.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스스로 더 가치 있다고 느끼는 선택지를 택하는 경향이 있고, 그 선택들은 무엇이 인생을 값지고 의미 있게 느끼도록 해주는가에 대한 개인의 대답이다. 그동안의 나의 선택들을 돌아보았다. 그토록 의미를 찾으려 애썼는데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는 태도는 하루하루를 더 의미 있게 해 줄 수 있는 삶의 방법들을 찾게 하며 삶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공허를 향해 한탄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을 돌보며 이미 의미가 가득함을 성찰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공기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듯 의미의 뚜렷함이 느껴지지 않아도 이미 존재함을 믿고, 선택에 대한 두려움에서 등 돌려 그렇게 하나 둘, 작은 움직임을 밧줄 삼아 늪에서 서서히 기어 나왔다.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운동을 등록하고, 하루의 할 일들을 헤아리고, 미루지 않고 일단 움직여서 작은 것부터 하나씩 말이다. 나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나를 구성하는 뿌리가, 기둥이, 골격이 되고 그것이 곧 한 권의 소설이, 하나의 답이, 하나의 세상이, 의미가, 내가 될 것이다.
친구들과 난생처음 야구장에 갔다. 야구팬이 아닌 나로서는 야구장에 갈 일이 없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공 하나에 환호와 탄성을 내지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삶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했던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안타 한 번으로 뛸 듯 기뻐하며, 남녀노소 하나되어 소리치며 응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토록 감격스럽고 벅차게 삶을 즐길 수 있는데 우리는 왜 일희일비하면 안 되는가. 나도 안다. 삶이 그만큼 녹록지 않고 기쁨은 잠시고, 슬픔에서 헤어 나오는 것은 지난하고 고됨을. 그럼에도 뛸 듯이 기뻐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진심으로 응원하고 온 힘으로 살아가자. 이보다 더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만물에 목적이 있어야 하나?" 신이 물었다.
"당연하죠." 인간이 말했다.
"그럼 이 만물의 목적을 생각하는 건 네게 맡기마." 신이 말했다.
그리고 신은 가버렸다.
_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