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항해일지
전직을 위해 퇴사를 하고 어느덧 꽤나 시간이 흘렀다.
삶의 단계에 따라 정해진 퀘스트가 있는 듯했다. 진학, 입시, 취업, 결혼, 출산, 육아...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 나만 불안함과 숨 막힘을 느끼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런 말을 꺼내면 깊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에 대한 관념이 더해져 더욱 옥죄는 느낌을 준다. 앞서 퇴사라는 선택에서도 이 퀘스트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왜 치열하게 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걸까, 언제쯤이면 이 판에서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하다 결국 퇴사를 했다. 드디어 자유로운 도비가 되어 백수생활을 이어갔다. 나에게 퇴사는 해방이었고 방학이었으며 내 삶의 핸들을 잡는 선택이었다.
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고군분투하던 전투에서 벗어나서일까. 친구들 앞에서 술 취한 기운으로 나의 행보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늘어놨다.
"나 지금껏 잘해왔어! 너무 고생했어. 지금까지의 선택이 내가 한 최선이야. 이제 과거의 나와 화해할 수 있어."라고 얘기하는 순간 눈물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화해라니. 그간의 시간이 빼곡히 전투이자 무거운 짐은 아니었으나 스스로를 억압하며 혹사시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술을 먹고 울며 이야기하다니, 마땅히 추태였으나 고집스레 얘기했다.
"우리 모두 잘하고 있어!"
다들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이루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으며 사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나를 허물어 마주하고 나니 꽤 나은 기분이 들었다.
일상의 방황은 글 도처에 묻어날 만큼 쉬이 물러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드문드문 그동안의 선택들을 돌아보며 이후의 방향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동원해 보고, 심리검사나 책을 활용하는 등 나름의 다양한 해석과 접근으로 열심히 고뇌했다. (이전글_퇴사 후 길 찾기) 그리고 '직업'에 대한 나의 인식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직업이란 생계유지에도 필요하지만, 자아실현이나 성장, 사회적 존재로서 접촉과 사회 기여의 역할도 수행한다. 일하는 것이 더 이상 억압이 아니며, 일을 그만두는 것이 해방과 화해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 직업으로 이루고 싶은 가치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퇴사한 사유에서도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지속 성장'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나는 성장할 수 있는가. 이 일을 지속해서 얻게 되는 메리트는 무엇인가.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가. 그에 대한 답으로 퇴사를 결정했고 이번에는 역으로 풀어가야 했다. 나에게 성장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내가 부러워하고 되고 싶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삶의 퀘스트에서 책임감 만땅 공격형 K-장녀인 나는, 동생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등 떠밀려 선택하지 않았으면, 시간과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보았으면. 그리고 어떤 선택이든 괜찮다고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사실은 내가 듣고 싶던 말이었다. 오래도록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바랐다. 비로소 과거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선택은 화해가 맞았다. 내가 겪어봤으니 너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신발끈을 묶어주고 싶은 당신은 이 불안의 해류를 무사히 넘어갔으면 한다. (이전글_스스로 헤엄) 이러한 기저가 쌓여 글을 쓰고 있으며 직업상담사를 준비하고 있다.
직업상담 공부를 하면서 흥미, 가치, 성격 등을 여러 방법으로 사정해 보는 방법에 대해 배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MBTI부터 직업선호도 검사, 직업가계도, 과거 선택 회상, 존경하는 사람 기술하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원하는 것, 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추려본다. 그리하여 비슷한 직업과 연결 짓더라도 개인의 적성이나 역량, 환경에 따라 맞지 않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선택을 미루거나 주변의 요구에 따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생계유지와도 관련 있고, 개인이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면 그 또한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이유로 수많은 갈래로 이어진다. 갖가지 노력으로 직업을 고려해 봐도 꼭 그리로 나아가라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거쳐 다양한 접근으로 상상해 보는 일은 충분히 쓸모 있는 일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답 없는 일의 해답을 찾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전글_삶의 의미를 찾아 Love Dive) 결국 이 과정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의사결정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정의 요약본이기도 한 말을 또 이어나가는 것은 책 【『명랑한 은둔자_캐럴라인 냅』】을 다시 읽어서 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무너지는 일상과 부서지는 하루를 보내며 이 책을 꺼냈다. 고독과 고립 사이에서 중심 잡기를 하고, 발톱을 깎으며 친구와 통화를 하고, 고민하다 수락한 약속이 독감으로 취소되니 내심 기뻐하던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깊이 끄덕이고 큭큭 웃었다. 그녀의 글은 솔직하고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 그리고 변화를 향한다. 어느 날 문득 <명랑한 은둔자>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자신을 정의한다. 그녀를 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했다.
나에게 삶 = 성장이다. 여행이 나로부터 떠나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일인 것처럼, 성장이란 나를 넓히고 깊이 있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지식과 성품, 인간관계, 성찰을 확장시켜 나가고 싶다. 커다란 그늘을 가진 나무가 되고 싶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언젠가는 튼튼하고 울창한 나무가 되어 나의 그늘에 많은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잭과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나무가 되는 법은 모른다. 더디더라도 어느새 자라 있는 신기한 우리 엄마의 화분처럼, 제 자신을 키워가고 싶다.
나는 은근한 성장가, 착실한 적응가, 혹은 내 삶의 철학자, 진지한 삶의 항해사이다.
나는 꿈꾼다. 직업상담사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나를. 다양한 직업과 세계를 연결하고 인터뷰하며 탐색과 이해를 확장시켜 나가는 나를. 나라는 사람과 글에서 사람들이 쉬어가거나 조금 더 넓어진 마음으로 다른 세계를 엿보고 넓어지기를.
호기롭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꿈을 말하는 일은 어쩐지 부끄럽다. 결연하게 글 썼어도 현실은 다를 수 있고 그에 맞춰 우회하거나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한 미래가 있을까, 구부러지거나 꺾여 실패한 것처럼 보일까 두렵다.
처음 캐럴라인의 글에 매료되었고, 다시금 빠져든 이유는 솔직함 때문이다. 나는 솔직한 글을 볼 때면 여과 없이 빠져들곤 했다. 글 앞에 자기 검열로 망설이는 내가 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녀가 변화를 추구했듯, 조심스레 좀 더 솔직해져 본다. 나는 여전히 실패가 두렵다. 하지만, 다시 한번 책 속의 문장과 나의 바람을 손에 꼭 쥐고 글을 쓴다.
내가 방법을 숨기면 남이 실수합니다. 내가 가능성을 숨기면 남이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 내가 숨기고 있는 것들_정도언 』】
내가 해봤으니, 당신은 불안의 해류를 무사히 넘어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