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항해일지
직업상담 공부를 하면서 직업상담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대해 배운다. 상담사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알맞은 진단과 선택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 직업과 진로 설정의 과정이 인생에서 이번뿐이라는 착각, 한 번 선택해서 잘못되면 끝이라는 오해 등이 그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착각'이지만 나 또한 자연스레 닿을 수 있는 인식이었다. 실제로 현직 상담사님께 들으니, 대신 선택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전 글에서 삶의 퀘스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열심히 주어진 퀘스트를 결판내온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열심히 퀘스트를 매듭지어온 플레이어에게 게임을 설계해 보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누군가 알려주는대로 선택하는 삶은 실패하더라도 자연스레 내 탓이 아니게 된다. 삶을 책임지는 법을 배운 적 없고, 경험한 적이 없는데 일생일대의 결딴을 내야 한다니 세상이 얄밉다. 더 나은 선택, 더 좋은 선택을 놓칠까 두려운 것을 안다. 애초에 선택지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겠으니 막막하기만 하다. 또한 이 과정은 전 생애에 거쳐 계속된다. 진로 설정, 취업, 적응, 퇴사, 이직, 창업, 은퇴, 노후까지. 선택은 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고,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등 다양한 벽에 부딪힌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하는지, 내가 잘못 선택한 건 아닌지 머리를 쥐어 뜯어본다. 상황은 좀처럼 타개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술로, 잠으로, 여행으로 회피도 해보고 '일'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며 단념도 해본다. 왜 아니겠는가, 이 모든 과정은 내가 겪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과연 직업상담은 유의미한가? 과연 그렇다. 고민이 있을 때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문제가 명확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스스로 언어로 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방향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상담사는 당신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줄 뿐 아니라, 당신의 말을 다른 언어로 정리하기도 하면서 상황을 재인식시켜줄 수도 있다. 자신과 상황을 객관화하기 위해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나는 직업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나는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삶이 퍽퍽할 때, 누구 한 사람만 이라도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응원해 준다면 그로써 조금은 괜찮아지는 경험을 한 적은 없는가? 나는 직업상담사를 꿈꾸기 이전부터 그런 존재가 되길 꿈꿨다.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힘을 아무 관련 없는 타인에게 공공연하게 전할 수 있다니, 얼마나 꿈꾼 일인지 모른다. 이 가치의 연장선으로 꾸준하고 깊게, 계속해서 넓혀가고 깊이 있는 울림을 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우습게도 나도 이렇듯 배우고 이해해서 알고 있지만, '나의 문제'가 되면 인식은 다시 악마의 웃음을 짓고 속삭인다.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고 보완하고 꼼꼼하게 구비해서 서류를 낸 들. 감감무소식이면, 기운이 쭉 하고 빠져버리는 것이다. 여기도 연락이 안 오면 어쩌지 하는 긴장감, 두려움, 의기소침함, 실망감.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오는 불안의 친구들. 안타깝게도 퇴짜를 맞는 것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번진다.
친구의 임신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무나 축하하고 기쁜 일이지만,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더뎌 보였고, 혹은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게 맞다고, 괜찮다고 스스로 애써 다독여도 검게 마구 칠한 낙서 같은 불안은 실실 웃으며 나를 따라다녔다.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소담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슬쩍, 내 차례의 카드를 뒤집듯 이런 불안을 꺼냈다. 스스로를 객관화하고자 노력하면서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것이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너에게만 집중하라고. 걱정 말라고. 그 말들이 휘청이던 나를 다독거리는 순풍이 되어 주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가 필요한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나를 고양시키면서도 추락시키는 일이라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일을 오롯이 혼자 이루는 사람은 없으니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가족, 친구, 연인 혹은 연결성 없는 타자들로부터, 서로의 순풍이 되어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날들에 살고 싶다.
얼마 전 처음으로 사람들과 러닝을 했다. 집 주변에서도 혼자 걷고 뛴 적이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생각보다도 일정 속도로 계속해 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였다면 걷고 뛰다 지쳐 타협했을 코스를 완주했다. 가벼운 대화에 헐떡이면서도 열심히 답하는 제 모습에 웃음이 났다. 어느 순간 머릿속의 꽉 찬 고민의 기운들이 훨훨 날아가 곁에 없었다.
적당히 열심히 살고 싶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허덕거리는 뜀박질 말고, 나에게 알맞은 속도로 천천히, 오래, 멀리 뛰고 싶다. 내 바람과는 다르게 계속해 다른 사람들의 등을 보고 달린다.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넘어질 것만 같다. 사람들의 등보다 주변 풍경을 볼 수 있게, 나를 더 좋은 환경에 데려다 놓기로 한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요인들에서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나의 속도에 집중하기로 한다.
내가 지금 혹은 앞으로, 직업적으로, 삶의 태도에 있어 해야 할 일은 저마다의 속도와 길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엔 수많은 정보와 관계, 현실 속에 놓여있는 내가 보인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내 속도를 찾는 것도, 그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갈래길이 나왔을 때 오래 지체하지 않는 것도. 인생을 완주하기까지 그 모든 것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당함과 꾸준함 뿐 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걸음을 옮기자.
글을 쓰고 있으니 조금 달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지만, 비가 오니 오늘은 글 속을 달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