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항해일지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뇌도 한 번 제 기능을 쉬게 해 주니 계속 쉬고만 싶어 한다. 공부도 할 때 해야 한다는 말이 점점 짙게 와닿는다. 퇴사 후 여행에서 돌아와 이제 뭐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쩐지 내내 제자리였다. 가닥이 안 잡히기도 하고 한번 늘어진 몸은 관성을 따라 계속 늘어졌다. 차라리 회사에 다닐 때가 훨씬 더 부지런했다. 운동에, 일에, 글쓰기에, 취미에, 약속에, 모임까지. 아주 빽빽한 날들을 보냈던 것에 비해 시간의 필름을 마구 꺼내 길게 늘이고 있다. 이렇게 지내다간 안 되겠다 싶어 작은 불씨들을 지폈다. 아침 루틴을 만들어 보라는 말에 뭐라도 시작해야겠어 전날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빨간 줄을 긋는 것으로 시작했다.
빨래, 독서, 글쓰기, 운동.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아르바이트를 찾아봤다. 딱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일정하게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세울 수 있을 듯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어쩐지 기운이 가라앉았다. 대학생 때부터 나는 빽빽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시급이 높은 곳, 주휴수당을 챙길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생활비를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신 알바 공고를 돈으로만 따져보니 최저시급이 오름에 따라 단시간만 알바를 구하는 일이 많았다. 주말 이틀 6시간, 주중 3일 4시간 식으로 사람을 구했다. 아마 딱 바쁠 때이거나 이외의 시간은 다른 사람을 써서 수당을 쪼개는 듯했다. 이렇게 한 달이면 50만 원도 되지 않는 돈이 모인다. 직장을 다닐 때 나의 연금형 보험비에도 못 미치는 돈이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 돈에 쫓기던 모습을 그려본다.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은데도 과거의 경험은 가뿐히 나를 잠식시킨다.
뭐든 되겠지! 안되면 어때! 하던 호기로움은 4년간 일하고 난 통장 잔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이 돈도 계속해서 쓰기만 한다면 없어져 다시 현실과 레이스 경주를 하겠구나. 생각하고 나니 먹지도 않은 속에 체기가 생겼다.
기분이란 것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참으로 금방 사람을 잠식시키는구나.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수면으로 뻐끔뻐끔 고개를 내밀고 숨쉴 수 있다. 기분이란 것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 날에 걸쳐 갈피가 보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게으름 피울 수 있어서 좋은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여유로울 때일수록 주변의 시선은 제쳐두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자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뛸 때와 비교해, 방향 찾기를 위해 제자리를 뱅뱅 맴도는 기분이랄까. 도무지 멈추지 못하는 이 나침반은 언제쯤 한 곳을 가리킬까. 정확하게 가리키지 않아도 좋으니 동남쪽인지 북서쪽인지 대략적으로라도 멈춰줬으면 좋겠다.
책을 읽고,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떤가? 알아보고 검색해 보다가 조금은 길이 보이는 듯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다시 우수수 무너져 원점으로 오길 반복했다. 살을 빼기 위해 식사 조절과 운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그 또한 쉽지 않다. 혼자 하는 것은 역시나 금세 허물어진다. 누군가 바라봐주고,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깊어간다. 외로움이 날 쓰게 한다면 그 또한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역시나 외롭고 싶지 않아.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그에 대한 감정소비는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은 어쩜 이리도 모순적인 존재일까.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은 삶의 반복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느낌이겠지. 지금의 내가 반복하는 것은 아등바등 일상을 일으키려는 노력과 그런 노력이 번번이 허물어지는 경험이다. 나는 생각도 많고 걱정과 고민도 많은 사람이구나 깨달았지만, 그것이 나를 붙잡는다. 집안에서 검색으로 손쉽게, 실제 환경을 영상으로 디테일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나의 작은 공간에서 최대한 많은 가지를 뻗어본다. 어딘가에 닿을 듯하다가도 자꾸만 꺾이고 구부러졌다.
며칠을 더 그렇게 보내다 문득 불안이 노크를 했다. 겨우겨우 내 공간에서 내보낸 감정이 잘 지내고 있는지 문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시간 내 공간을 독식하고 나를 괴롭혀온 녀석이 건네는 기척이 싫지만은 않았다. 결국 불필요한 감정이란 없으니까. 네가 필요하긴 했었구나.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던 일상에서 불안의 필요성을 알게 되는 것을 보니, 역시 소중함은 없어져 봐야 인식하는 것이다. 불안도 한번 내쫓겨 봤으니 알겠지. 제 크기를 장악하려고만 한다면 다시 안락하고 따듯한 내 안에서 내쫓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라는 인간의 행복과 만족, 생산성과 성찰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니 불안이란 녀석은 독재의 비효율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인데, 내가 어떤 감정에 삼켜지지 않고 온전하고도 균형 잡힌 상태로 나아가는 것.
불안, 그래 너도 필요하구나. 방향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아가지 않는다. 방향을 잡는 일조차도 동력이 필요하다. 네가 필요하다.
여유롭게 시작한 방황은 줄곧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꽤나 거센 항해 중이지만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