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심장 나라의 새가슴 가족

새가슴을 위한 나라는 없다

by 그랑바쌈

금요일 밤, 자기 전부터 막내 원이가 아침 8시 전에 깨워달라고 신신당부다. 준영이 건민이랑 만나 놀기로 했단다. 아이들의 약속은 휘발성이 강하다. 내키는 대로 내뱉고 기억저장소에 담아두진 않는다. 토요일 이른 아침 약속이라니 보나 마나 허탕 칠게 뻔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지만 녀석은 또 속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빠 이번엔 진짜야. 확실히 8시 30분 놀이터로 정했다고"

큰소리를 치며 집을 나섰다.

창밖을 보니 당장 비가 쏟아질 듯 흐렸다.

얼마지 않아 원이가 툴레 툴레 들어왔다.

역시나 허탕이다.


피는 못 속인다. 원이만 할 때 같은 반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주말에 자기 생일이라며 놀러 오라고 적이 있다. 다른 동네 사는 친구여서 주소도 몰랐다. 선물을 사들고 하루 종일을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맸다. 비를 맞아 홀딱 젖어도 초대에 늦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뿐이었다. 허탕 치고서 어둑해져서야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 만난 친구는 초대한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생일도 아니었다.


넉넉히 2주 전 잡은 점심 약속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가벼운 두통이 느껴졌다. 금요일. 여느 때였다면 연가를 내고 쉬는 쪽을 택했겠지만, 약속을 취소하는 것은 그 날 아침 두통보다 조금 더 거슬리는 일이었다. 출근해서 점심 리마인더를 보냈더니 이내 미안하다는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괜찮다는 이모티콘으로 답하고는 괜찮지 않았다.


"인생 짧아요. 자신한테 집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에요. 그러려면 남한테 과감히 NO! 할 줄 알아야 돼요."


얼마 전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강연에서 해준 충고다. 모두가 끄덕끄덕한다. 맞는 얘기지만 가혹하게 들렸다. 그게 말처럼 쉽게 안되더라는 것이다.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져버릴 때 밀려드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자라온 환경 탓도 있겠지만 원이를 보면 유전이라는 생각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일방적인 것은 없다지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관계 속에도 더 많이 주는 쪽과 더 많이 받는 쪽은 있다. 그것은 키가 크고 작고, 체력이 좋고 나쁘고 처럼 타고나는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선악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강심장 보단 새가슴의 세상살이가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것이다. 상처 받으며 성장해갈 자식을 지켜보며 가슴 졸이는 내 모습도 새가슴 아빠의 숙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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