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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경 Apr 16. 2024

성이 다른 세 여자

세대를 세우는 여자의 일생

중학교 때 기 드 모파상의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읽고 정말 많이 슬펐었다.

이 지구상의 여자는 결국 이렇게 희생하며 힘들게 가족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억울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올무가 되어 남편을 만나고 낳은 엄마와 성이 다른 아이를 낳고 기르며 평생 살다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주고 세상을 떠나는 것만이 여자의 일생인지 그리고 그것은 그 여자의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지 깊이 고민하였었다.



그즈음에 우리 에도 성이 다른 여자 셋이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가게 되셨고, 그곳에서 딸 둘을 낳아 기르면서 잘 사시다가 할아버지의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것이 발각이 되어 밀항하시고 할머니와 두 딸은 일본이 항복하기 바로 직전에 한국에 오시게 되고 그렇게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기셨단다. 그리고 바로 6.25 전쟁을 온몸으로 받아 견뎌내셨다.

그런데 딸만 둘인 것이 큰 어려움이 셨던 외할아버지는 온가족이 좋은 시절이 와서 드디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다른 여성분과 사신다고 집을 나가셨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도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아들 없는 서러움을 무겁게 안고 살아내셨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는 남자를 참 좋아하셨다.

내게 가끔 " 혜경아 니가 복이 많데이. 니 뒤로 남동생을 둘이나 두었으니 얼마나 행복하노"

나는 그 당시 왜 두 남동생 때문에 행복한지 잘 몰랐지만 늘 남동생들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상할 때가 많았다.

내가 설거지를 다하고 들어오면 할머니는 나를 다시 불러서 이것저것 내가 건조대에 차곡차곡 엎어둔 그릇들을 살펴보시고 깔끔하게 닦아서 찬장에 올릴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

할머니가 나만 자꾸 시키고 두 남동생들은 시키지 않는 것이 정말 속이 상했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왜 할머니가 그러시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앉아 일본 노래도 부르시고 조용히 화투를 꺼내 혼자 치면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가 너무 슬퍼 보여 나도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그리고 특히 몸이 아픈 큰 딸 집에 와서 모든 가정일을 도와주시는 할머니가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 할머니는 딸인 나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셨다. 아픈 큰 딸의 가정의 일을 가정부는 아니시지만 거의 환자 이신 어머니를 돌보며 혼자서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인데 한 번도 힘들다 하지 않으셨다.


또한 할머니의 아픈 딸의 딸인 내게도 늘 힘이 되어 주셨다. 집안이 가난해서 내가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순간에 할머니는 장롱 깊숙이 숨겨두신 자신의 반지와 금 브로치를 꺼내 주시면서 학비를 내라고 하셨다. 그것들을 팔아 나는 대학 첫 등록금을 냈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을 하셨다.

"여자도 꿈이 있제... 꼭 하고 싶은 것 다하거래이,
만약에 네가 시집 안 가고 공부하믄  내 뭐든지 해서라도 니를 도울 끼다..
혜경아 꼭 뭐든지 하다가 멈추지 마래이.."


하루의 반나절은 누워 계셔야 하는 나와 성이 다른 여자인 나의 어머니는 폐결핵 과의 전쟁에서 이기셨지만 남겨진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 내가 아파서 사랑하는 어머니 곁에서 살 수 있어 행복하네,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어머니는 내 옆에 안 오셨을 거야"라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세 여자를 두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셨을 때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 된 큰 딸인 어머니는 울 시간도 없었다고 하신다. 고등학교 때부터 도우며 일하던 고아원에서 그 고아들을 보며 자신의 처지와 같기에 더욱더 열심히 그들을 섬겼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엄마와 여동생을 돌보고 아버지 대신 살아내야 했었단다.

그리고 본인이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어머니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하셨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우리 어머니는 버림받지 않으셨을 텐데...


몸이 약한 어머니는 할머니에게도 나에게도 항상 고마워하셨다.

워낙 고왔던 마음 때문인지 어머니는 본인의 능력은 정말 미약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많이 들어주셨다. 집에는 늘 아주머니들이 많이 방문하셨다. 저렇게 육체적으로 힘이 없는 어머니 이시고 말씀도 조용조용하시는 분이 그리고 더군다나 가난하고 어느 누구보다 괴로웠을 환경의 어머니가 어떻게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를 해주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를 하셨다.

새벽예배를 드리러 매일 교회를 갈 정도의 건강은 아니시기에 집에서 혼자 예배 보시고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우리 삼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도를 하셨다.

한참 자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너무 괴로웠었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되도록 머리를 만지지 않게 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매일 새벽을 설쳤다.

"각하 일어나시게 이제 학교 가셔야지 응.. 우리 각하 잘 잤나?"

새벽 내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기도하신 것도 짜증 나는데.. 갑자기 각하라니.. 이렇게 가난한 우리 집에서 그런 단어가 나온다는 게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나는 " 엄마! 이렇게 사는 각하 보셨어요?"라고 대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웃으시며 매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각하라고 부르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과 아픔 속에서 희망을 선포하는 어머니의 기도였던 것 같다.

그 기도는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내가 어머니 눈에는 가장 귀한 딸이라는 것을 그 가난한 작은 쪽방에서 알려주셨다.

환경과 상관없이 난 엄마의 각하이고 멋진 딸이라고..

그렇게 가난한 가운데서도 엄마의 각하였던 나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를 찾아 떠났다.

가난과 아픔을 조금 알기에 그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 가난한 각하로서 그들의 가난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나와는 성이 다른 딸을 낳고 아들을 낳았다.

 



우리 세 여자의 일생은 우리와 성이 다른 아이들을 낳마치 계주 달리기 게임에서 바통을 들고뛰는 주자처럼  열심히 달려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고 떠나야 하는 삶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리고 또 그다음 세대를 위해...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내게 손을 내미셨다.

그리고 산소마스크를 벗기라고 하시고는 내게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당부를 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가슴에 계속 메아리치고 있다.

"내 딸 혜경아!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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