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기의 삶을 바꾼 용기!
사막의 먼지를 안고 불어오는 바람이 나일 강물 위를 스치던 오후였다.
나는 오래된 건물의 좁은 복도 끝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약간 두려움이 스친 얼굴로 수줍게 인사를 했다.
흰 가운 대신 그녀의 팔에 안겨 있던 것은 아주 작은 아기였다.
아이의 얼굴은 그녀와 달리 피부가 까만 아이였다.
그 아기의 엄마는 너무 어려 보였고, 어떻게 이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단다.
살기조차 버거운 현실 속에서, 그 엄마는 아이를 병원에 남겨둔 채 말없이 떠나버렸다.
그러나 아이를 살린 사람은 가족도, 법적으로 정해진 보호자도 아니었다.
그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나의 친구였다.
그녀는 우연히 마주한 이 작은 생명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책임과 두려움이 묻어 있었고, 잠시 돌 봐주던 시간 속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애정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모든 병원비용을 그 아기 엄마대신 다 지불하고, 병원에 더 이상 둘 수가 없고 마땅한 시설도 없어서 집에 데리고 갔다.
이 나라에는 ‘입양’이라는 말이 없다.
대신 ‘보호자’라는 제도가 있지만, 그것은 단단한 울타리가 아니라 종이 한 장의 약속일뿐이다.
그래서 낯선 종족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이름만 가족일 뿐, 낮에는 물을 나르고, 저녁에는 밥을 차리고, 밤에는 마당을 쓸며 하루를 마감한다.
사랑과 노동, 돌봄과 이용의 경계는 흐릿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전통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눈을 보았다.
어른보다 깊고, 습관처럼 미소를 띠지만, 오래된 슬픔이 그 눈동자 속에 가득했다.
며칠 동안 친구와 함께 지내며, 나는 그녀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을 보았다.
아기를 품에 안고 낯선 한국 언어로 무언가를 속삭일 때, 아기는 얼굴을 살짝 비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사막 끝에 흐르는 강가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빛이었다.
떠나는 날, 나일강은 유난히 고요했다.
햇빛이 강물 위로 쏟아져 내려 마치 강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나는 마을 끝 강가에 서서 그녀와 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강물 위에 작은 파문이 번졌다.
' 아가야 네가 좋은 엄마를 만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해 아가야!
하나님 이 아이의 삶을 축복해 주세요!'
돌아오는 긴 여정 내내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런 상황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작아 가슴이 저려왔다.
한 생명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걸까?
깊은 분노와 슬픔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내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던 친구의 모습이 마치 아기를 품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삶은 얼마나 다양한가!
어느 부모, 어느 지역,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태어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보았다.
‘버려진 자’에서 ‘선택받은 자’로
‘방치에서 사랑으로’
그녀의 품에서 자라는 아기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먼 길이었지만 선물을 사들고 나는 그녀를 자주 방문했다.
그때마다 품 안에서 더욱 예쁘게 자라나는 아기를 보며, 내 마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아이는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 평안히 자라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최고의 멋진 결정으로 또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기적이 태어나고 있었다.
사랑으로 품어진 이 순간이 그 아기의 삶에 가장 오래 살아있는 생명이 되기를 기도한다.
'어쩌면 이 아기도,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지만 한민족을 노예에서 자유의 삶으로 이끌어낸 멋진 리더가 되었던 성경 속 모세처럼, 언젠가 그의 민족을 이끄는 리더가 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