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위에 내리는 단비
내 삶의 기적은 천둥 번개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메마른 마음 위에, 소용돌이치는 간절함 속에,
이슬처럼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하루를 버틸 힘 속에, 그리고 다시 웃을 수 있는 평안 속에, 이미 기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니, 그 모든 날들이 기적이었다.
나는 첫째 딸이고 엄마의 유일한 딸이다.
내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 딸 곁에서 온 힘을 다해 함께 걸어준 사람은 나의 사랑하는 엄마였다.
그 존재 만으로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한 기둥이 세워지는 듯한 안점감을 주는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자녀들이 다 장성하여 제길을 가고, 부모님은 시골의 작은 집에서 두 분이 소박하게 살아가셨다.
사람의 여정은 누구나 다 그렇듯이 시간이 되면 아프기 시작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특히 한쪽 폐가 없으신 엄마에게 그 시간은 더 가혹했을 것 같다.
내 몸에서 발견된 갑상선 종양은 그 당시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젊으니까.. 문제가 되면 수술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엄마의 온전한 회복이었다.
얼마 전, 중환자실에서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엄마를 두고 먼 나라로 떠나야 했던 그 순간, 내 가슴은 하루 종일 칼로 베인 듯 아려왔다.
비행기로 하루를 꼬박 날아야 닿는 거리에서, 전화를 걸 때마다
“내는 괜찮다. 너는 어떻니 딸아!”는 엄마의 목소리 뒤로 숨겨진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고 거친 숨결 하나가 내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다행히 예전 병원 동료들이 부모님을 돌봐주었고,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꼼꼼히 살펴주었다.
그 사실 하나가 그 먼 곳에서 나를 붙잡아주는 끈이 되었다.
그즈음 종양을 잊어버릴 만큼 나는 버거운 하루를 살고 있었다.
무턱대고 시작한 아이들의 홈스쿨도 내가 교사이자 부모이자 친구가 되어주어야 했고,
여러 가지 사역까지 맡아 내 몫은 끝없이 불어났다. 이 모든 것이 내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하루의 끝에 침대에 몸을 눕히면, 온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때로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대충 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도 제게 힘을 주세요. 기적을 허락해 주세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되찾았고, 결국 걸어 다닐 만큼 잘 회복되셨다.
더 이상 엄마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어졌다.
조용히 기적은 내 삶에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 역시 몸이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매일 고백했다.
'아픈 것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다. 아프다면,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내자. 그러다 보면 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다하기까지 나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종양도, 내 세포 중 하나로 품고 살아가자.’
좋은 병원이 없는 곳이었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꾸준히 먹으며 종양과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은 날이 갈수록 가벼워졌고 마음은 평안해졌다.
두려움 대신 감사가 내 안을 채웠다.
아직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깨달았다.
기적은 이미 천천히 조용히 내게 이미 단비로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만난 기적은 단번에 번쩍 내려앉는 번개처럼 오는 것이 아니었지만, 하루하루를 버틸 힘 속에,
그리고 다시 웃을 수 있는 평안 속에 이미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갑상선 종양은 21년 이 지난 오늘도 내 몸에 존재하고 있다.
아주 천천히 사이즈가 자라고 있고 이제는 매년 하던 조직 검사도 못할 정도로 겉 세포가 딱딱해졌단다.
그래도 매년 검사를 하고 나면 꼭 마지막에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종양 모양이 악성이네요... 내년에 또 봅시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병원문을 나서며 매번 생각한다.
'어쩌면 매년 해온 조직 검사 때문에 그 암세포들이 다 사라진 건 아닐까?'
그 순간, 조용히 이슬처럼 기적의 단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미소가 내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