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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에 눈이 내려요

하얀 기적 하나

by 천혜경

나는 추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더운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살다 보니 어느새 사계절이 있는 대한민국이 그리워졌다.

특히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은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소중한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늘 추운 겨울만 되면 ‘눈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살던 집의 창 커튼에 하얀 솜을 달아 겨울마다 눈 오는 풍경을 흉내 내곤 했다.

하얀 솜이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과 웃었고, 눈을 경험하지 못한 두 아이는 커튼에 달린 솜방울을 만지며 즐거워했다.
더운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그 아이들에겐, 그 소박한 연출조차 특별한 겨울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이집트에 겨울이 되면 많은 분들이 오셔서 봉사 활동을 하셨는데,

수고하신 분들에게 떠나기 전에 시내산을 보여드리기로 하였다.


하루 전, 우리는 시내산 근처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 날 새벽 등반을 계획했다.
우리 팀은 각자 숙소로 흩어졌고, 나는 세 분의 연로한 권사님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던 중,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서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흰 눈이 살며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느다란 눈발이더니 이내 굵고 풍성한 눈송이들이 온 숲을 하얗게 덮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나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울었다.

너무도 아름다웠고, 감격스러웠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벅차올랐다.

그때,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너를 위해 오늘 눈을 뿌렸단다...”


나는 꿈속에서 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깊은 감동을 받아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나를 흔들며 깨웠다.

“선교사님, 꿈꾸셨어요? 왜 그렇게 우세요… 무슨 일이세요…”

내가 흐느껴 우는 소리에 옆에서 자던 권사님들이 모두 놀라 깨어난 것이다.

나는 꿈을 꾸며 흘린 눈물을 닦으며, 벅찬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하나님이… 저를 위해 눈을 뿌려주셨대요… 꿈이었는데도… 너무 감동해서…”


권사님들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무슨 큰일 난 줄 알았어요. 세상에 그래 눈이 그리울 수도 있네요.. 이런 곳에는 눈이 안 오지요?”

"네! 일 년 내내 비도 잘 오지 않거든요, 눈은 더욱 안 온답니다."

우리 모두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고,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잠시 후, 아침이 되었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선교사님! 눈이 와요! 지금 시내산에 눈이 내려요!”


방금 전 나와 함께 잠들었던 권사님 중 한 분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밖에 나갔다가,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을 보고 깜짝 놀라 나를 데리러 달려온 것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그 하얀 눈발 속에 한참을 서 있었다.


정말로, 시내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내 눈앞에서 흩날렸고, 그리고 내 손에 닿자마자 다 녹아버렸다.

그것은 분명히 '눈'이었다.


우리 방의 네 여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세상에… 시내산에 눈이 다 왔네요? 그런데 선교사님은 새벽에 눈이 오는 꿈도 꾸시고 , ! 하나님의 음성도 들으시고 완전 기적이네요. 이런 일이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발을 맞으며 서 있었다.

곧 많은 사람들이 숙소밖으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치며 눈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눈으로 인해 시내산 등반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모두들 그 안타까운 사실과 상관없이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비록 땅에 떨어지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이었지만,

한참이나 흩날린 눈송이는 시내산 바위틈 구석구석 자신의 존재를 하얗게 남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기적,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깜짝 선물이었다.


그날, 시내산에 내린 눈
그리고 그 전날 밤 내게 주어진 꿈.

이 모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인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내가 말로 꺼내기도 전에 내 마음을 이미 아시고, 이 시내산에서 미리준비하신 선물이었다.

나는 그 하얀 눈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 사랑은 내 가슴속에 평생을 두고 살아 숨 쉬는 확신으로 심겼고, 지금도 살아 울리고 있다.


“내가 너의 작은 신음까지도 듣고 있단다.”


우리는 그날, 눈 때문에 시내산을 오전 내내 오르지 못했다.

늦은 오후에 눈이 멈춘 뒤, 모두 무사히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 당시 핸드폰이 없고 사진기도 없어서 놀라운 추억을 한 장도 남기지 못했지만,

시내산 바위 사이사이를 살짝 덮었던 눈의 자국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가장 선명한 증거로 남아 있다.



그날 새벽, 눈 내리던 꿈과
바로 몇 시간 뒤에 내린 눈은,
평생 잊지 못한 내 삶의 하얀 기적이었다.


아마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운 그 세분의 권사님들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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