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우리 목욕가요

엄마와 딸의 추억

by 천혜경

"어머니 우리 목욕가요!"


어린 시절부터 나는 수증기 가 가득한 목욕탕 안에서 숨쉬기 힘들어하시는 어머니를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목욕을 시켜드려야 했었다. 수술로 인해 골이 파진 상처가 깊은 곳은 정말 살살 부드러운 거즈로 때를 밀어야 했었다.


목욕탕 가격도 비싸서 한 달에 한번 겨우 목욕을 가던 시절이었기에, 엄마를 항상 먼저 목욕을 시켜 드리고 내 보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씻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 어머니를 목욕시키는 데 아주 능수 능란 해졌지만, 초등학생인 나는 이미 어머니를 씻겨 드린다고 힘이 빠져서 나를 씻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어서 밖에 나가서 어머니 옷 입는 것을 도와야 했기에 항상 나의 목욕은 대충 물을 끼얹고 나오는 것이 다였다.


그럴 때마다 씩씩한 엄마들이 징징 우는 아이들의 등을 때리면서 밀어주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오사카에서 태어나셨다. 일제시절에 외할아버지 외 할머니가 일본 오사카에 기술자로 징용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10살 즈음에 외할아버지가 다른 징용당해 온 한국인들을 돕다가 발각되어서 급히 온 가족이 몰래 밀항을 하게 되셨다.


진해에 살면서 맞이하게 된 6.25 전쟁 그리고 해방 후 선교사님들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얼마나 행복하셨는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역사들을 온몸으로 견뎌내신 내 어머니!


20대 중반에 늘 쫓아다니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시고 셋째 아이를 낳고 한 달이 지난 33살의 어머니는 급성 폐결핵으로 오른쪽 폐를 절단하시게 되었다.


6살인 나와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을 할아버지 댁에 맡기고 돌을 갓 지낸 막내 동생은 외갓집에 맡기고 어머니는 요양 병원에 들어가셨다.


그 이후로 5년간 요양원에 머무시면서 모진 고통을 이겨내시고 내가 10살 즈음에 우리 옆에 오셨다.


우리 가족은 성남의 판자촌에 집을 얻어 잠시 살게 되었다. 아프신 어머니는 밀가루 한포라도 받으려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시기도 했고 또 온 가족이 연탄가스로 쓰러지기도 했었다.

그 이후 부산으로 이사와 단칸방에 5명의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매일 아침 어머니는 내게 늘 솜뭉텅이를 가지고 오른쪽 수술 자국의 움푹 파인 자리에 넣어달라고 하시고, 그 위에 살짝 브레이지어로 고정하시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가지런히 잘 정리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숨을 한번 쉴 때 두 번씩 쉬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숨을 잘 쉬고 계신지 습관처럼 지켜봤다.


기침하시고 누워 계시는 약한 어머니이시지만 지금 옆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안정이었다.




먼 땅에 나가 선교사로 살면서 목욕할 때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의 등을 밀어줄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항상 마음이 쓰렸다. 어쩌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 때면 나는 미안해서 묻는다.


" 어머니 목욕은 요즘 어떻게 하세요?"


"사랑하는 딸아! 내 잘하고 있데이. 대충 물끼 얹고 하면 되지 뭐! 그래도 내 말갛고 깨끗타 걱정하지 마래이 니 오면 한번 목욕탕에 가자!"


나는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친정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목욕탕에 갔었다.


국수 가락 같은 세월들을 밀어내고 한 바가지 물로 다 끼얹어 씻어 낼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세월에 주름 이 깊어지셨고 힘이 없으셔서 난 더 빨리 밀어드려야 했고, 이젠 숨이 차서 탕에도 못 들어가시겠다고 하시니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서 나는 애꿎은 얼굴에 하얀 바가지로 연거푸 물을 끼얹었다.


옆에서 효도하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하나뿐인 딸이지만 항상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의미 있는 삶을 살라고 품에서 밀어내시고 아픈 몸을 혼자 가다듬으며 살아내신 내 어머니!


내일은 친정에 가서 어머니랑 목욕탕에 가는 날이다.

이렇게 목욕탕을 어머니와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에 가장 큰 행복이다

나는 두근거리며 시계를 본다.


"어머니 내일 우리 목욕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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