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저자 김이경 그림 윤석남, 576권

by 우보

감상

끊임없는 항쟁의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오히려 슬픈 결말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 배신、 또는 실종。 자식의 죽음、 멸시、 차별 등

대한민국 처럼 독립운동가가 차별받은 나라가 있었던가?


36년의 일제치하에서 친일파로 사형을 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반면 프랑스는 4년 독일 치하에서 수천명을 처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 신채호의 아들은 신생 대한민국에서 차별받아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단재는 2000년대 들어서야 국적이 회복되었습니다.


한인애국단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큰 역할을 했던 이화림은 좌파 경력으로 인해 기록이 삭제되었습니다. 후에 김구 선생과의 노선 갈등으로 갈라섰으며, 결국 중국인으로 의사로 살며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작곡가 정율성에 대한 기록들도 나옵니다.

좌익이었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역사를 지우는게 옳은건지?

친일을 했어도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는데 역할을 했으면 친일 기록을 지우는게 옳은건지? 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볼만합니다.



이 책의 한 문장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 정정화



p32

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3월 13일 새벽, 그는 영면에 들었다. 당시 그를 간병하던 양녀 배학복은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했다.

"나는 선생님의 임종에서 처음으로 화색이 도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당했던 고뇌를 벗어놓으셨기 때문이라 생각되었습니다. ... 평소 원하셨던 분홍색 수의를 입혀드리고 삼일장을 지낸 후 화장해 대동강물에 뿌렸습니다"

평생 폭력에 맞서 싸우느라 고단했던 몸은 푸른 대동강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그가 소망하던 조국 광복은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에 찾아왔다.


p34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가장 큰 지식은, 대중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란 겁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자본가의 착취에 신음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1931년 5월 29일 을밀대에서 강주룡이 한 연설


p54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 회고록 《장강일기》중에서


p63

정화는 오히려 담담했다. 작은 체구와 달리 그는 원체 겁이 없었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처음 시집살이를 시작한 백운장은 인왕산 기슭에 숲으로 둘러싸인 대저택이었다. 인왕산 호랑이가 유명하던 시절, 어느 날 어스름한 마당에서 정화는 커다란 범과 딱 마주쳤다. 그러나 열댓 살밖에 안 된 소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담담히 범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안했을까, 범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대담부적,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담이 크다는 말 그대로였다. 훗날 임정 내무장 조완구가 정정화의 온몸이 전부 담이라 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결국 신규식은 정화의 뜻을 받아들였고, 내친 김에 친정에서 돈을 구한다는 사적인 계획을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이라는 공식 임무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국내 잠입은 임정의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이용하고, 대동단 사건으로 삼엄한 감시를 받는 친정을 피해 다른 곳에서 자금을 구하기로 했다. 김가진이 유력 인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한지에 백반 물로 글씨를 써서 얼핏 보면 백지같지만 불에 쪼이면 글씨가 드러나는 암호편지였다(나중에 이 방법이 탄로난뒤에는 편지지를 노끈처럼 꼬아묶는 방법을 썼다.


p76

“10년의 감옥 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 그래서 이따금씩 꿈을 그리다가 현실 앞에 깜짝 놀라곤 해요. 가정은 민주주의적이긴 합니다. 서로 다 혁명운동에 이해가 있지요. 그러나 집사람도 봉건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어요. 내가 무얼 쓰면 여자가 저런 걸 쓴다고 퍽 신기하게 여겨요."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 박진홍>, <독립신보》, 1946년 11월 14일 자 인터뷰 중에서


p115

중국으로 떠났던 아들 신수범은 해방 후 귀국해 은행에서 일했는데,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 은행을 그만두고 넝마주이와 부두 노동자로 떠돌이 삶을 살아야 했다. 임시정부 시절 신채호에게 탄핵당한 데 원한을 품은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로 모는 바람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탓이었다. 더구나 신채호가 일제 법을 거부해 호적과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 신수범은 한국에서 평생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살아야했다. 신채호는 2009년에야 국적을 회복했다. 아내 박자혜는 미혼모인 채로 죽고, 아들 수범마저 1991년 세상을 뜬뒤였다. (박자혜)


p131

무릎을 꿇리더니 그 위에 나무토막을 놓고 올라서고, 등을 벗겨서 쇠좆매로 때리고 갖은 고문을 하는데 제일 심한게 물고문 ! 머리를 잡아채고 코에 물을 붓는데 처음엔 바닷속에서 물건 캐오는 시간 정도만 참으면 되겠지 생각했거든. 아니야, 순진한 생각이더라고. 너무 괴로워서 그냥 졸도를 하게 돼. 겨울인데, 정말 죽겠다 싶어.


그래도 견뎠어. 주모자를불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안했어. 자칫하면 우리 선생님들이 고초를 겪을 테니까. 우리한테 선생님들은 부모보다 더한 분이야. 부모는 어디 사상이나 공부에 대해서 얘기해주나? 다들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공부시키고 눈을 뜨게 해줬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았지. 나중에는 일제 경찰들도 우리 해녀들의 강인한 기질과 단결심에 탄복을 하더라고.


결국 우리 셋은 6개월 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어. 다행히 고순효랑 김계석은 다른 동네로 잘 피해서 감옥살이를 면했는데, 그 바람에 해방되고 독립유공자 선정할 때 속상하게도 제외가 됐어. 감옥만 안 갔다 뿐이지 독립투쟁을 안 한 게 아니잖아. 친일파들한테는 웬만하면 이해해주자고 하면서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한테는 왜 그리 깐깐하게 구는지…….

(김옥련)


p156

“내 가진 돈은 모두 249원 80전이다. 그중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축하금으로 바치거라.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자손에게 똑같이 유언하여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해라. 남은 돈의 절반은 손자를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데 쓰고 나머지 반은 친정의 종손을 찾아 공부시키도록 해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 임종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남자현)


p176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 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너무 강폭한 투쟁으로 오히려 해를 입는다면 항일투쟁에 가담, 활동하지 아니함만 못한 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녀는 잔잔한 미소만 띠고 긍정하지 않았다.” (안경신)

-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 최매지의 회고


p198

“1915년 벌목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나는 목재 창고 근처에서 중키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노동자들은 그가 러시아어,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이라고 수군거렸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라 김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노동자들을 대했고 사업주 앞에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모든 점에서 그를 신뢰했다."(김알렉산드라)

- 러시아의 우랄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노동자 김시약의 회고


p218

“어린 마음이었지만 항일투쟁에는 무조건이었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날며 왜놈들을 쉽게 쳐부술 수 있는 비행사가 되려고 마음을 다졌지요."(권기옥)

- 잡지 《여원》 1961년 7월호 인터뷰에서


p276

“끝까지 혁명의 길을 걷겠다고 결정한 이상 작은 가정에 연연할 수는 없었다. 비록 희생이 뒤따랐지만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었다. 평양을 떠나고 어머니를 떠나면서 나는 이미 희생을 치렀다. 나는 이미 이 길에 올랐고, 후퇴할 이유도 없으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이화림 회고록》 중에서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2화빨간 기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