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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기와집

가와타 후미코, 575권

by 우보 Dec 22. 2024

감상

몇 년 전 오키나와에 간 적이 있습니다. 5박 6일을 여러 호텔에서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렌터카로 돌았습니다. 오키나와가 미군의 점령지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위안부로 살아간 조선 출신의 여인들이 살았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길 스스로 포기한 여성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찢긴 세월이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었겠지요. 무엇보다 이 책의 작가인 가와타 후미코가 10여 년에 걸쳐 인터뷰하고 배봉기 씨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 와서 어릴 때 잃어버린 언니까지 찾는 노력은 감사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이지 않은 커밍아웃이지만 특별체류허가를 얻기 위해 위안부임을 고백해야 했던 배봉기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가도 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란이 이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성적 학대자였던 그녀들도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일본 장교와 동반 자살한 위안부도 있었고요. 때때로 군인들의 친절을 자신의 안위를 살펴준 오키나와의 주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들의 인생사에 아파옵니다.


이 책의 한 문장


          "오키나와 사람들은 친절하지요."


1

봉기 씨의 인생은 한반도의 마을에서 도시로, 그리고 오카나와의 마을에서 도시로 떠다니는 방랑의 연속이었다. 긴 방랑 끝에 다다른 이한 평짜리 오두막에서, 봉기 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친절하지요."

봉기 씨가 하는 말이다.


2

봉기는 야무진 데라고는 없는 한심한 사내와 함께하는 생활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혼자 마을을 떠났다.


3

중국에는 이미 매춘가가 적지 않았지만 일본군으로서는 전쟁 상대국의 업자에게 위생 관리를 맡기고 그것을 철저하게 감독하기는 어렵고 성병 감염 방지는 더욱 곤란했다. 그래서 일본 육군은 군이 직접 관할하는 '육군 오락소'를 1938년에 설립했는데, 군 직영 위안소가 안팎으로 불평을 사 얼마 후부터는 경영을 업자에게 맡기고 그것을 군이 감독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군대 전용 위안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일하는 위안부로 식민지 한국의 여성이 많이 끌려갔다. 일본의 창기 일부도 돈을 벌기 위해 참여했다. 또 전쟁의 참화로 육친과 집을 잃은 중국 여성도 업자에게 팔려 '만삐'나 '지나삐'로 불렸다. 


4

세이지씨는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 연행私戰争犯罪, 朝鮮人强制连行》에서 군 명령에 따라 한국 최대의 섬인 제주도의 젊은 여성 205명을 불과 일주일 만에 모았다고 증언한다. 그는 어장이나 목장, 건어물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처녀를 군대와 경찰의 협력을 얻어 불문곡직하고 그 자리에서 마구잡이로 트럭에 태워 연행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포악한 방법을 썼다는 사실을 보고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끌어모은 위안부의 수는 5만~7만 명이라고도 하고, 20만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5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어요. 뭐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요 그대는 배가 너무 고파서 죽는 게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무서웠는데, 나중에는 그냥 배가 고프다는 생각만들더라고요. 맞아요 배고픈 게 무서운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산에 있을 때부터 월경은 없었어요 전혀. 산에서 그것까지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8개월 정도 없었어요 영양부족으로……………. 없어서 천만다행이었지."


6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는 하사관도 돌격하러 가서 죽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그 하사관은 봉기가 친근감을 느끼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사관 쪽에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한국에서 온 여자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 하사관은 도카시키 섬에 와서 승진해 동료들과 축하를 겸해 빨간 기와집에 온 적이 있다.


7

징용병들은 영장은 고사하고 아무 절차도 없이, 그것도 논이나 밭이나 각자 일터에서 일하던 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인간사냥꾼들이 가족과 연락도 못 하게 하고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식으로, 마치 들개를 사냥하듯 마구잡이로 끌어모아 연행해 온 사람들이었다. 제3전투부대에서도 징용병은 피라미드형 계급제의 밑바닥에 놓여 위험한 작업, 과중한 노동에 이용되었다. 봉기도 일본군에게 학대당하는 동포의 비참한 모습을 자주 보았다.


8

생각해 보면, 봉기 씨가 본 '나라'는 늘 이방의 국가였다. 봉기 씨가 태어났을 때 한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군 지배하의 오키나와에 살던 전후 시절에도 그랬고,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뒤에도 봉기 씨에게 '나라'는 이방의 국가였다. 봉기 씨가 '나라'라고 할 때 그것은 늘 고향을 의미했을 뿐 국가를 상기시키는 경우는.....


9

소네 씨는 한국인 징용병에게 먼저 투항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 판단으로 한국 징용병은 전진훈戦陣訓(1941년 1월 8일, 당시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가 군인들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규범으로 제시한 훈령이다. '살아서 포로의 능욕을 당하지 않고......'로 시작하는 구절이 유명하다. - 옮긴 이)에 세뇌되지도 않았고 황국 사상도 갖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끌려왔을 뿐, 군을 위한 충성을 맹세하거나 천황폐하를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징용병도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남편이니까 한 사람이라도 많이 모으고 싶었지만, 워낙 위험한 일이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들통 나면 당연히 총살입니다. 군인이 적진 앞에서 도망치다가 잡히면 그 자리에서 총합니다. 충분한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10

봉기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했을 거라고 직감했다. 민간용 유곽이었는지 군의 감독하에 설치된 위안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노자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을 보면 기노자에 있었을 것이다.

봉기는 후쿠오카 출신이라는 사치코와 말은 통하지 않아도 죽이 잘맞았다. 언제부턴가 가즈코와 봉기, 그리고 다섯 여자들은 큰 막사에서 내부가 방 넷으로 나뉜 천막으로 옮겨졌다.....냉증이 있어서 남보다 갑절은 민감한 봉기에게 마루처럼 바닥에 깔라며 어디에선가 판자를 갖다 준 사람은 사치코다. 


11

13년의 세월이 지나 시즈 씨는 가즈코의 아들을 찾아갔다. 가즈코의 아들에 관한 기사가 《오키나와 타임스 사회면에 크게 》 실렸기 때문이다. 아들이 진학할 시기가 되어 상선 대학(현 도쿄 해양대학)에 지원했는데, 무국적이라 여권을 취득할 수 없어서 본토로 건너가지 못하고 입시를 치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지 않던 시절이다. 그래서 오키나와와 본토 간의 왕래에는 여권이 필요했다. 가즈코는 그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죽었다. 오랫동안 미군을 상대로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난소인지 신장인지가 망가져 수술을 했지만 경과가 좋지 않아 숨을 거뒀다. 수술비와 입원비도 낼 수 없었다는 걸 보면 만족스러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지 않았을까, 시즈 씨는 생각했다.


12

노래를 아주 잘하는 여자가 한 명 끼어 있었다. 미요로서는 뜻을 알 수 없는 한국 노래가 조용한 그 일대에 울려 퍼졌다. 구슬픈 노래가 많았다. 미요가 알 리 없는 한국 노래 중딱 하나는 들어 본 것이었다.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나카무라 씨집에 있던 한국 여자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귀에 익은 그 노랫소리가 자주 흘러나왔다.


13

이것저것 궁리해서 맛있게 먹으라고 반찬을 했지만 여자들은 가즈코씨가 만든 나물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마늘과 고춧가루, 생채소를 원했다. "우리는 이거면 충분하니까 밥만 해 주면 반찬은 필요 없어요." 하고 생채소에 밥을 싸서 먹었다. 어느 날 "아주머니 이것 좀 먹어 봐요." 하는 말에 채소에 싼 것을 먹었다. 가즈코씨는 마늘 냄새가 코를 찔러 맛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참고 삼킨 다음 맛있다고 맞장구를 쳐 주었더니 빙그레 웃으며 여자들끼리 자기네 말로 한참 이야기를 했다.


14

나는 그날 전해야 할 것들을 모두 전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다시 봉기 씨를 찾아가 늘 하던 대로 봉기 씨의 이야기를 테이프에 녹음하는데, 얼마 뒤에 맥락도 없이 불쑥 "그래, 언니는 건강하던가요?" 하고 어제 내가 돌아간 뒤 궁금했을 것을 물었다.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릴 때 헤어진, 만날 가능성도 거의 없는 언니의 소식을 듣고 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또 며칠 뒤 신례원의 모습같은 것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봉선 씨와 외삼촌 일가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기 씨가 봉선 씨와 똑같은 말을 했다.

"신례원까지 갔어도 언니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랬어요"

여섯 살과 여덟 살 때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가족, 이 늙은 자매의 절망을 내가 감히 추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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