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574권
감상
한강 작가의 아버지는 광주 중흥동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한때 중학교 교사였던 작가의 아버지는 그 집을 산 사람이 자신들의 중학교 제자임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80년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그 집의 중학생 소년들이 죽은 것을 작가는 알게 됩니다.
한강 작가는 어렸고, 시간이 흐르며 점차 그 진실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광주를 찾았고, '동호'라는 이름의 소년의 흔적이 찾아갑니다. 그 고통의 흔적들을 글로 옮깁니다. '동호'였던 소년의 형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습니다. 광주의 길을 걸으며 그 아픔을 함께 하며 글로 옮깁니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어 세 번째 읽는 한강 작가의 소설입니다. 80년의 광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던 저는 울컥함을 느끼며 책장을 덮었습니다.
망월동 5.18묘지에서 보았던 참혹한 사진들이 소설에 나오는 장면들을 더 몰입하게 합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처절한 삶의 기록처럼 느껴집니다.
이 책의 한 문장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p10
가늘게 눈을 뜨자 도청 앞 은행나무들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아직 한방울의 비도 바람 사이로 튕겨져나오지 않았다.
p12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p17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p27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알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께에 있을까.
p49
풀벌레들이 소리 내어 날개를 떨고 있었어. 보이지 않는 새들이 높은 음조로 울기 시작했어. 검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눈부시게 잎 스치는 소리를 냈어. 창백한 해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맹렬하게 하늘의 중앙을 향해 전진해 올라갔어. 덤불숲 뒤에 쌓인 우리들의 몸은 이제 햇빛을 받아 썩기 시작했어.
p64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어.
한번에 수천개의 불꽃을 쏘아올리는 것 같은 폭약 소리. 먼 비명 소리. 한꺼번에 숨들이 끊어지는 소리. 놀란 혼들이 한꺼번에 몸들에서 뛰쳐나오는 기척.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빛이 없는 허공으로 번지며 나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p72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 순간을 외면했다.
p76
여러번 접어 해진 자국을 따라 손쉽게 접히는 종이처럼 의식의 한 부분이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p89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아니, 도청을 나오기 전 너를 봤을 때 이미 부서졌다.
p92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을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102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이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p103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p130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p161
생시에 가까워질수록 꿈은 그렇게 덜 잔혹해진다. 잠은 더 얇아진다. 습자지처럼 얇아져 바스락거리다 마침내 깨어난다.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p183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 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으 ㄹ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말도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서울에 있었음스로....형이 뭘 안다고....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p190
그저 겨울이 지난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