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를 아시나요?

by 동천 김병철

요즈음 ‘보릿고개’라는 유행가가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엔 확실히 보릿고개가 있었다. 겨울을 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봄날 5월쯤이면 지난해 가을 수확한 쌀 등 식량이 바닥나고 보리 수확이 아직 일러 먹을 것이 없던 어려운 춘궁기를 우리 선조들은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이때는 초근목피로 끼니를 잇거나 걸식이나 장리쌀로 겨우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초여름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내야 했다.

보릿고개가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연례적으로 겪게 된 것은 1910년대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일제가 농민들의 토지를 탈취한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우리 농촌을 일제의 식량 기지화하기 위해 1920년대에 전개되었던 산미증식계획이 우리나라 농민을 더욱 몰락시킨 결과 보릿고개가 더 심해진 것이다.

이런 보릿고개를 벗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되고,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성과를 거둔 이후의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부황증에 걸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때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다. 그나마 농촌에서는 얼마간의 식량을 이웃 간에 서로 융통할 수 있어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었지만 일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는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도시 노동자들 대부분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일용잡부가 많았다. 내 초등학교 친구는 아버지가 버스 정류장의 짐꾼이었는데, 너무나 가난하여 초등학교 6년 동안 단 한 번도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오질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가 운동장 구석에 있는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친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물론 학교에서는 미국으로부터 무상원조로 받은 옥수수가루나 우유가루를 이용해서 죽을 쑤거나 빵을 만들어 급식으로 내놓았고 우리들은 그걸 별미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힘든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내 기억으로 우리가 어느 정도 쌀밥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은 1970년 이후 ‘기적의 쌀’로 불리던 다수확성의 신품종, 이른바 ‘통일벼’가 널리 보급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통일벼로 지은 밥은 찰기가 없고 우리 입맛엔 별로였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전국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식량(쌀) 자급이 이루어지자 1977년엔 그동안 금지되었던 쌀막걸리 제조가 허가되었다. 쌀이 부족하여 쌀로 술을 담그는 밀주를 금지할 땐 당시 세무서 직원들의 역할 중 하나가, 집에서 쌀막걸리를 제조한 사람들을 적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동네마다 곳곳에 ‘밀주는 만들지도 말고, 팔지도 맙시다!’라는 포스터가 나붙고 신고자에겐 포상까지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이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옛 속담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어 할 때 이웃 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산지가 70% 이상을 차지한 일본열도에는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왜구들은 자국의 부족한 식량(쌀)을 보충하기 위해서 한반도 해안지대를 끊임없이 노략질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을 식량 기지로 전락시켜버렸다. 그러나 일본은 일찍이 개방하여 우리보다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쌀을 대신할 수 있는 여러 대체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구황작물은 아마 감자와 고구마 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는 ‘고구마’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안했다. 물론 ‘고구마‘라는 말도 있긴 했지만 ’고구마’는 ‘감자’로, ‘감자’는 ‘하지감자’로 불렀다. 똑같은 감자인데, 진짜 ‘감자’는 6월 하지 경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고구마라는 말도 자주 쓰지만 어릴 적엔 그냥 감자라는 말을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한자 사전을 찾아보면 ‘감자’는 본래 ‘감저’(甘藷,甘苧)에서 나온 말임을 알 수 있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이 원산지가 아닌 고구마를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까? 나는 그 사실을 알고서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본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덩이줄기를 먹는 식물을 통상 ‘이모’(苧,いも)라고 한다. 그 덩이줄기 식물, 즉 ‘이모’(苧,いも)에는 토란 참마 고구마 감자 등이 있다.

집 근처 마을에서 나는 ‘이모’, 즉 토란은 마을(里,さと)에서 나는 감자라고 하여 ‘사또이모‘(里芋, さといも)라고 하고,

산에서 나는 ’이모‘, 즉 참마는 산(山, やま)에서 나는 감자라고 하여 ’야마이모‘(山芋, やまいも)라고 한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여온 감자나 고구마는 그 명칭이 좀 다르다.

내가 말한 ’하지 감자‘(夏至 甘苧), ’감자’(甘苧)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들여왔다고 하여 자카르타의 앞 두 글자 ’자카‘를 따와 ’자가이모‘(ジャガ芋)라고 한다.

감자, 즉 고구마는 멕시코 고산지대가 원산지로 추정되는데 1,500년대 멕시코를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에 의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마닐라와 중국 복건성(福建省), 그리고 류쿠왕국(지금의 오키나오)을 거쳐 1705년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구마의 최초 일본 재배지가 지금의 ’가고시마’(かごしま,鹿児島)‘로 옛날엔 ’가고시마‘를 사츠마‘(さつま,薩摩)라고 불렀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고구마를 ’사츠마이모‘(さつまいも,薩摩芋)라고 한다.

이들 네 종류의 ’이모‘(いも,芋) 중에서 부족한 식량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수확량이 많고 맛도 좋은 ’사츠마 이모‘였다. 당시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일본에서 ’사츠마 이모‘가 구황작물로서 인기가 좋았고, 그 후 ’사츠마 이모‘를 많이 재배하여 쌀 대신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부모님께도 배불리 봉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츠마 이모‘가 부모님께 효행하는 구황작물이 되었다는 뜻에서 ’효행마‘(孝行麻)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효행마‘(孝行麻)의 일본어 발음이 ’코코마‘(孝行麻)인데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우리 나라에 전래되면서 ’고구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고구마의 한반도 전래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조선 영조 때인 1763년 조선통신사 조엄이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목격하고 가져와 이듬해 제주도와 동래부(부산) 영도에서 재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내 고향에서 ’감자(甘苧)‘는 ’하지 감자‘(夏至甘苧), ’고구마‘는 ’감자‘(甘苧)라고 하는 것에 대해 나는 고향 사투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제대로 말한 것이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이런 ’고구마‘가 일본어라는 사실을 우리 국민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말로만 애국이니 뭐니 하지 말고, 무작정 일본을 배척하는 것보다 국어학자 등 사회 지도자들이 일본어 등 외래어 정화부터 하나둘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생활 속에 너무나도 많은 일본어가 뿌리내렸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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