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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Feb 02. 2024

위험하오니 횡단보도 안쪽으로 들어와 주세요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반쯤 뜨고 아이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좋은 하루 보내라 손을 흔들고 배정받은 구역으로 간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교통봉사를 위해서다. 한 달 내내 오늘을 체크하면서도 피하고 싶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노란 깃발을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새빨간 토마토로 변할 것만 같다. 잘하고 오라며 나를 꼭 안아준 아이 앞에서 싫은 티를 낼 순 없었다. 오늘은 학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날. 비장하게 조끼를 입고 깃발을 단정하게 펴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제법 쌀쌀해진 아침이다. 삼삼오오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친구와 손잡고 걷거나 아빠엄마와 함께 콩콩 뛰는 아이들. 서로 툭툭 치거나 소리를 지르며 학교를 향해 달리는 아이들도 있다. 킥보드와 자전거가 교차로 지나가고 여기저기 웃음소리와 함께 욕설도 들린다. 얘들아, 아침부터 욕은 하지 말아 줄래. 마음속으로 중얼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등껍질 안으로 목을 바짝 넣은 거북이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어서 삼십 분이 후다닥 지나갔으면. 끝나자마자 뜨거운 커피 한잔을 사서 집에 갈 생각으로 버티기로 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질서를 지키는 초등학생보다 중, 고등학생들이 긴장의 대상이었다. 빨간색으로 신호가 바뀌어도 횡단보도 중간까지 오지 못한 채 세월아 네월아 휴대폰 삼매경이다. ‘위험하오니 횡단보도 안쪽으로 들어와 주세요’라는 신호등의 기계음은 무용지물이다. 모두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까. 보다 못한 나는 달려가 노란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느릿느릿 횡단보도를 건넌다. 전동 킥보드와 무단횡단 역시 골칫거리다. 두 명씩 붙어 서서 전동 킥보드를 탄 아이들은 무법자 같다. 노란 깃발이 있든 수많은 차들이 있든 막무가내로 도로를 가로지른다. 혼낼 테면 혼내보라는 듯 무단횡단을 할 때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어린 동생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을까. 분명히 오른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설상가상으로 도로 위에는 까치와 까마귀 떼가 점거 중이었다. 누군가 음식을 흘리고 갔는지 새들이 날아드는 통에 자동차들도 피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자동차 경적소리를 배경음으로 킥보드와 자전거, 어른과 아이들이 아슬아슬 줄타기하듯 횡단보도를 건넌다. 마스크 속 내 얼굴은 거의 울상이었다. 기계적으로 깃발을 열고 닫을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겨우 십 분이 흘렀는데 진이 다 빠져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와중에도 웃으며 눈인사를 하거나 목례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사리 손을 흔드는 꼬마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는 어린이가 있었다. 횡단보도의 하얀 줄을 부지런히 건너는 사람들을 보다가 생각했다. 남은 시간 동안 용기를 내보자. 소심하게 횡단보도 끝에 서 있지 말고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보자. 나는 횡단보도와 도로 사이에 씩씩하게 자리 잡았다. 크게 깃발을 흔들고 팔을 휘저으며 위험하게 건너는 아이들을 횡단보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양을 모는 보더콜리처럼. 모두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식은땀이 절로 났다. 몇 번의 신호가 바뀌는 동안 콧잔등과 등에 땀이 흥건했다. 추웠던 몸이 풀리고 따뜻해졌다. 슬슬 봉사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여학생이 난처한 얼굴로 횡단보도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까 달려가면서 가방 안에 있던 실내화가 떨어진 거 같아요.”

“여기서 떨어진 물건은 못 봤는데 어쩌죠?”

“제가 건너가서 한번 찾아볼게요.”

   

실내화를 한쪽만 신은 학생의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다시 길을 건너온 양말이 새까맣다. 실내화를 찾지 못한 채 다시 학교로 향하는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마스크를 내리고 크게 외쳤다.

     

“조심해요! 바닥에 날카로운 게 많으니 잘 살펴보고 걸어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라고 수줍게 인사하는 학생의 얼굴이 맑다. 남아 있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위험하오니 횡단보도 안쪽으로 들어와 주세요'라는 기계음이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다. 텅 빈 횡단보도를 보며 오늘의 임무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십 분이 더 지나 있었다.


  안개가 걷히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내린 얼굴 위로 상쾌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오늘 아침이 아니면 절대 마주칠 일 없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의 아침이 무탈했으면. 부디 오늘 하루가 평온했으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조금씩 사람들이 있는 삶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싶어졌다. 뜨거운 커피를 사서 집에 오자마자 이 글을 썼다. 일상의 순간을 차곡차곡 모아 글로 남기다 보면 나의 글에도 온기가 스며들지 않을까. 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이 마음들이 그대로 전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그게 바로 내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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