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은 길다. 아이 얼굴을 실컷 보고 뒹굴거리며 느슨하게 보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힘들다. 삼시 세끼와 간식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싱크대에는 언제나 설거지가 한가득이다. 한숨 돌리는가 싶으면 그 다음 메뉴를 고민해야 한다. 말 그대로 돌아서면 밥 하는 엄마가 되는 길고 긴 방학. 그래도 이제는 요령이 좀 생겼다. 미리 2,3일치 식단을 짜고 필요한 재료를 준비해 둔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먹고 싶은 게 달라질 수 있으니 유동적으로 메뉴를 변경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찬 가짓수에 집착하지 않기. 한 그릇 음식이라도 정성스럽게 준비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입이 짧고 편식이 심했던 딸은 최근 들어 제법 잘 먹는다. 새로운 음식을 궁금해하고 맛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스스로 이것저것 먹어보며 좋아하는 맛을 찾아가고 있다. 때가 되면 아이들은 다 알아서 한다는 말은 진짜였다. 부모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찬장에서 아이의 작은 그릇을 꺼내며 생각한다. 여기에 사랑을 가득 담아 너를 배부르게 해야지. 저녁 그릇을 정리할 때면 오늘 하루 몇 번이나 고생한 그릇들에게 저절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릇은 예쁘다. 물건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지만 정갈한 그릇과 컵은 좋아한다. 이사 준비를 하며 깨지거나 낡은 것은 정리하고 좋아하는 그릇 몇 개만 남겨두었다. 신혼 때부터 쓰던 것들은 귀퉁이가 깨지고 여기저기 긁혀있다. 짝이 맞지 않는 밥그릇과 국그릇은 이제 그만 버리고 내 취향에 맞는 그릇을 사고 싶다. 이사를 하고 나면 새로운 그릇을 신중하게 고를 생각이다. 빈 그릇에 음식을 담을 때마다 마음이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음식을 먹으며 가족과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싹싹 비워진 그릇을 보면 중요한 일을 잘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이 있다. 이 모든 기쁨은 빈 그릇으로부터 시작된다.
요리에 큰 재능은 없지만 자잘한 재미가 있음을 알아가는 나날이다. 신선한 재료를 고르고 영양소에 맞춰 식단을 준비하고 그릇에 정성스럽게 담는다. 가족을 먹이고 살찌우는 일에 공들이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배우는 중이다. 내가 품고 있던 생명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것. 내가 아끼는 사람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 엄마가 통화할 때마다 밥은 먹었느냐 묻는 이유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배불리 먹이는 일. 빈 그릇을 사랑으로 채우는 기쁨. 의심할 여지없는 가장 확실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