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내내 퇴보하는 기분이었다. 움츠러드는 몸처럼 마음이 자꾸만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아이와 부둥켜안을 수 있는 따뜻한 겨울이었지만 실은 외로웠던 모양이다. 엄마밥을 못 먹은 지 벌써 일 년이 넘었고 가까웠던 사람들도 하나둘 멀어졌다. 이사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새로운 집에서 좀 더 생기 있는 삶을 살아야지. 그런 마음으로 겨울이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라면 일단 껴안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계절이 오고 세상 밖으로 한 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요즘 내가 꼭 지키는 루틴이 있다. 매일 아침 30분씩 운동하기. 등교시간에 맞춰 함께 집을 나선 뒤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는 아파트 헬스장 문을 연다. 오래 쉬었다 하려니 만만치 않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늘리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동네를 많이 걷는다. 마트에 가거나 서점, 도서관에 갈 때 부러 낯선 길로 돌아간다. 아직 쌀쌀하지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다. 땅에 닿는 발의 감촉이 좋다. 제대로 세상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어제는 조금 먼 곳에 있는 서점을 목적지 삼아 오래 걸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섹션이 잘 나눠져 있고 관리가 잘 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친절했다.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 해도 읽는 사람은 어딘가 분명히 있다. 서점은 꾸준히 생겨나고 어떻게든 제자리를 지킨다. 없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라인으로 사려던 책 한 권을 사고 나왔다. 주변을 걷다 보니 반찬가게와 아담한 카페, 맛집 포스를 풍기는 식당, 작은 빵집 같은 새로운 가게를 발견했다. 익숙한 길로만 다니면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아무리 몇 년 전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해도 많은 게 바뀌었고 어떤 곳은 다행히 그대로다. 그 경계를 즐기며 매일 산책 중이다. 오늘은 또 어떤 길로 가볼 까.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걸으며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다. 한데 모아 어떤 글을 쓰면 좋을까 고민한다. 그렇게 매일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다. 동네를 몇 바퀴 돌더라도 결국은 집으로 향한다. 나의 1인용 테이블이 종착지다. 그리고 남김없이 글을 쏟아낸다. 걷지 않으면 쓰지 못했을 이야기들이다.
나무와 덤불마다 초록과 노랑이 조금씩 얼굴을 내민다. 얼어붙어 있던 세상 곳곳에 봄이 스미고 있다. 걷기 좋은 계절이 온다. 오늘은 걷다가 발견한 조그만 카페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시원하고 맛있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매일 반복되는 듯해도 이렇게 낯선 틈 하나를 만들면 완전히 다른 하루가 된다. 가지 않던 길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만나자. 어느새 주변엔 봄이 한 움큼 피어나고 있고, 우리는 평소와 다른 동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행복을 배달해 주길 기다리지 말자. 망설이지 말고 기꺼이 행복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 먼 곳이 아닌 우리 각자의 동네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