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은 내게 참새 방앗간이다. 구경만 해야지 하면서 늘 삼십 분은 머물게 된다. 심플한 걸 좋아하지만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도 애정한다는 사실을 문구점에서 깨닫는다. 내가 몇 가지 수집하는 물건이 있다면 문구류일 것이다. 필기감 좋은 연필과 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노트, 잘 지워지는 지우개와 수정테이프, 카드와 편지지. 나는 이런 것들을 좀처럼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펜 하나만 사려고 갔다가 양손 가득 카드와 편지지를 사고 말았다. 누군가의 얼굴을, 축하하고 싶은 기념일을, 의미를 담은 마음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골랐다. 편지지라면 이미 넘치게 가지고 있는데도 자꾸만 사게 된다. 스승의 날이나 생일, 졸업식, 결혼식, 어버이날, 크리스마스, 어린이날에 유용하게 쓰지만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들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다. 이유도 모른 채 서먹해지고 나면 무용해진 카드와 편지지는 조용히 뒤로 감추게 된다.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차곡차곡 쌓아둔 편지지와 카드는 작은 민트색 상자에 담겨 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마다 잔뜩 설레거나 주저하던 날이 떠오른다. 자리를 찾지 못한 부유하는 마음들이 여기에 있다. 속절없이 변하는 관계를 눈치챌 때마다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시큰거렸다. 가끔은 세게 쿡쿡 찔리는 기분도 든다. 내가 더 노력해야 했을까? 서운함을 숨기고 허허 웃으며 뭐든 다 괜찮다고 말해야 했나? 화가 나도 한번 더 참았다면? 그랬다면 이 수많은 카드와 편지지는 주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피어난 감정이나 마음은 매일 다른 형태로 변하니까. 내게 머물렀다 어디론가 떠난다. 나 역시 그들에게 머물렀다 되돌아오는 것처럼. 어쩔 도리 없는 인연이 삶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종종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이제는 단순하게 생각한다. 단순한 마음이 주는 힘에 기댄다.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스스로를 칭찬하고, 나의 가족에게 감사하고, 읽고 싶은 책과 쓰고 싶은 글이 있음에 기뻐한다. 내게 다정한 응원을 보내주는 몇몇을 진심으로 아낀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는 점점 더 간소해지지만 마음은 오히려 따뜻함으로 가득 찬 기분.
올해는 이 작은 상자를 천천히 비워나가려 한다. 상자를 뒤집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도 와르르 쏟아낸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나의 진짜 마음들은 늘 여기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를 탓하는 못난 말 대신 이 마음을 잘 지켜낸 자신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 모든 것은 흐르고, 관계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음을 안다. 그저 묵묵히 오늘의 글 한편을 쓰자. 아끼는 이에게 편지를 쓰자. 반갑게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자. 그렇게 벌어진 시간의 틈을 메우고 마음을 나누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