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수첩이다. 연한 우드톤의 표지에 부드러운 색의 내지를 가지고 있다. 가로 14, 세로 20 센티미터 정도로 손바닥 한 뼘보다 약간 큰 사이즈다. 나는 많은 이야기로 채워지길 바라지만 여전히 비어있어 답답하다. 몇 글자 끄적이다 멈추게 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이야기를 쓸 이유가 있을까. 허무함을 못 이겨 서랍 속에 들어가 긴 시간 머물기도 했다. 글 같은 거 안 쓰면 그만이지. 잘 쓰고 싶은 마음 따위 뿔뿔이 흩어지길 바라던 시간. 그러나 쓰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고여 있었다. 결국 스스로 서랍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한번 써보자는 용기는 벌써 몇 번이고 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좀 더 씩씩하고 단단한 용기다.
매일 작은 이야기를 모은다.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쓰자. 그러자 주변이 새롭게 보였다. 산책을 하거나 창가에 앉아 쏟아지는 햇빛을 받을 때, 맛있는 것을 먹거나 아이를 꼭 안고 있던 밤에도. 모든 순간이 무궁무진한 글감이었다. 거실 테이블과 도서관, 카페에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썼다. 오늘은 글을 쓰며 행복했지만, 다음날엔 울고 싶었다. 마음과 문장이 따로 놀고, 종이 위 모든 단어가 진부했다. 역시 나에게 어울리는 건 어두운 서랍 속이지. 자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럴 때는 펜이 가는 대로 아무 말이나 썼다. 빈 종이를 내가 쓰고 싶은 단어와 문장으로 마음껏 채워나갔다. 주제도 없고, 말장난 같은 글에, 띄어쓰기도 엉망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비 오는 날 물웅덩이를 참방거리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쓰면 쓸수록 선명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지루한 일상 속 빛나는 순간을 찾아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꿔보고 싶다고. 매일 빈 종이를 글자로 채우며 엷은 희망을 찾았다.
나는 아무도 들여다 볼일 없는 작은 수첩이다. 평범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러나 내 안에는 하얀 조약돌 같은, 잔잔한 호수 같은, 반짝이는 윤슬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더 이상 쓰는 삶을 미루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수첩을 채우려 한다. 한 권, 두 권 성실하게 책상 위에 쌓고 싶다. 이 작은 수첩을 누군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열어보는 날이 오겠지. 그 사람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질 수 있도록, 여운이 남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글을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