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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Dec 07. 2023

정갈한 글씨를 쓰던 사람


  작은 수첩에 필기감 좋은 펜으로 글을 쓴다. 오랜만에 펜을 잡느라 손목이 시큰거리지만 도저히 놓을 수 없다. 내 힘으로 직접 글을 만들어 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쓰다 보면 내 글씨가 이랬구나 새삼 알게 된다. 나는 바르고 단정한 고딕체 글씨를 쓴다. 손 편지를 쓰거나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글씨 예쁘다는 말을 듣곤 했다. 아마 아빠를 닮았으리라. 아빠는 궁서체 글씨로 무언가를 끄적이던 사람이었다.


  아빠 주변에는 언제나 메모지와 펜이 있었다. 통화를 하거나 담배를 태우거나 책을 읽을 때도 손은 늘 분주했다. 신문, 광고지, 이면지, 포장지, 티슈, 포스트잇, 명세서. 곳곳에 궁서체 글씨가 무늬처럼 새겨졌다. 뭘 쓰는 걸까.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아빠가 자리를 뜨면 그제야 슬쩍 훔쳐보았다. 내용은 몰라도 좋았다. 그냥 아빠의 정갈한 글씨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정체 모를 단어를 조합해 상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한자와 숫자, 영어, 일본어, 이름, 누군가와 나눈 대화.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린 탓에 종이가 옴폭 들어간 부분도 있었다. 펜이 오래 머문 곳에는 나도 오래 머물렀다.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아빠와의 거리를 상상으로 채우던 유년이었다.


  아빠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입 밖으로 감정을 쏟아내지 않기 위해 수많은 메모지가 필요했으리라. 남겨진 메모들은 때때로 비밀스러웠다. 어려운 시 같기도,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같기도 했다. 유난히 글씨가 아름다워 보이는 날의 메모는 보물 상자에 넣어두었다. 하루는 아무렇게나 던져둔 껌 포장지에 숫자가 반복해서 적혀 있었다. 반짝이는 은색 종이 안 아빠의 글씨. 빛을 받아 물결처럼 일렁이는 글씨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했다.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아빠의 글씨는 아빠 그 자체였으니까. 아빠의 세상을 열어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으니까.


  궁서체의 아빠와 고딕체의 나는 다르면서도 닮았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고,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다. 각진 턱선을 지녔으며 미식가다. 무엇보다 우리는 책을 좋아한다. 아빠의 책을 펼치면 밑줄과 메모가 가득했다. 말보다 글이 편했던 사람. 나는 우리가 닮은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대책 없는 경제관념과 말도 안 되는 배려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세게 친 사람들과의 술자리에 기어코 나가는 아빠가 미웠다. 자꾸만 엄마를 울게 만들던 선택들. 집의 크기가 줄어들고, 몇 번의 이사가 이어졌다. 우리 가족은 공중분해되어 흩어졌다. 대학생이 된 나는 집을  떠나며 다짐했다. 절대로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며 살 거라고. 슬프게도 내 삶 곳곳에는 아빠가 있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미련하게 사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면서도 미워하는 마음. 두 가지 감정이 오갈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떨어져 사느라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아빠. 만날 때마다 아빠의 손은 여전히 바쁘다. 수첩에 메모하는 일이 재밌다는 내 말을 들으며 슬쩍 펜을 가져간다. 커피잔 옆 냅킨을 반으로 접어 ‘수첩, 메모’라고 적는다. 아빠는 마음 편히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지난밤 아바가 읽던 신문지 구석에 쓰여있던 단어들. 그 위로 어지럽게 그려진 여러 겹의 동그라미는 나만 알고 있기로 한다.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까. 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혼자 삼키던, 정갈한 글씨를 쓰는 사람에 대해.


“엄마, 무슨 이야기 써? “

아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아빠 주변을 서성이기만 하던 나와 다르게 딸은 직접 묻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응, 엄마는 아름다운 글씨를 쓰던 사람에 대해 쓰고 있어.”

“어, 나도 글씨 잘 쓰는데. 엄마, 이것 좀 봐봐.”


  동시를 썼다며 공책을 펼치는 딸의 눈이 반짝인다. 아빠를 닮은 나, 그런 나를 닮은 아이. 칸마다 또박또박 쓴 글자가 귀엽다. 나는 너에게 어떤 글씨를 가진 사람으로 기억될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어떤 삶을 살아도 그저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있게. 나는 나, 너는 너 각자의 글씨체를 가진 삶을 살자고. 우리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말을 안으로 삼키는 게 아니라 입 밖으로. 얼굴을 바라보며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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