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처럼 힘없이 녹아내릴듯한 여름이다. 집에 있자니 무기력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이 가득하고 시원한 도서관은 여름을 가장 생기 있게 보낼 수 있는 장소다. 매일 오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있다. 산뜻한 짧은 백발의 할머니가 그중 한 명이다. 11시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늘 나의 대각선에 앉는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모자를 벗고 연두색 등산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하늘색 손수건과 송골송골 방울이 맺힌 물병이 가방 안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신문을 전부 꺼내와 차곡차곡 쌓고 하나를 펼친다. 신문과 할머니와 도서관. 올여름 가장 기억에 남을 풍경.
할머니는 미동도 않고 신문에만 집중했다. 그 우직함이 좋아 언제나 11시가 되길 기다렸다. 할머니는 검지를 들어 글자 위에 밑줄을 긋듯이 신문을 읽었다. 잠시 손을 멈출 땐 이마 위에 川자 모양 주름이 생겼다. 작은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손이었다. 읽다 말고 메모하는 순간의 의미를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마음에 작은 물음표가 생기고, 글자 너머 숨겨진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내 안에서만 머물던 편현합을 벗어나 넓은 차원의 시선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순간이다.
할머니와 마주치지 못한 날엔 괜히 신문을 들춰보았다. 커다랗고 얇은 종이에는 글자들이 차렷 자세로 줄지어 서 있었다. 내가 신문을 언제 읽었더라. 어린 시절 숙제를 위해 가위로 몇 개의 기사를 잘라내던 기억 말고는 가물가물하다. 말랑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단어를 읽는 나와 달리 할머니는 바르고 단정하고 정제된 단어를 읽는다.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읽고 있었다. 문득 새로운 단어들을 읽고 싶어졌다.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던 과학서나 철학서, 경제서를 몇 권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처음 글자를 배우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읽었다. 이해되지 않는 이론들은 따로 영상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하나 둘 다양한 질문이 생겨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났다.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매일 제한적인 삶을 산다. 책이나 신문, 휴대폰 속 뉴스기사를 통해 아주 잠깐 다른 세상과 만날 뿐이다. 다른 세상과 만나는 짧은 순간, 우리의 세계는 읽을 것과 읽지 않을 것, 알아야 할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 그럼에도 마주해야 할 진실들로 나뉜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좁은 우물에 머물 것인가, 그 경계를 뛰어넘을 것인가. 나와 할머니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읽고 생각하는 일은 인간을 크게 성장시키므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우리는 언제까지고 배워야 하는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된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우웅우웅, 신문 넘기는 소리가 팔랑, 나의 타자소리도 타닥타닥. 우리 앞에는 글자만 남아 있다. 고요하다. 각자의 세계가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꺼억, 정적을 깨는 할머니의 트림 소리와 함께 신문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벌써 세 번째 신문을 집어 든 할머니 옆에는 꼭꼭 씹어 먹어치운 신문 두 개가 곱게 포개져 있다. 할머니에게는 앞으로 읽을 신문이 남아 있고, 창문 밖은 아직도 여름이다. 나무도 꽃도 하늘도 구름도 햇빛도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계절. 읽고 쓰며 우리는 이 계절을 보낸다. 뜨거운 계절 안에서 싹트는 우리의 세계. 다가올 가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또 내년 여름에도. 도서관에서 태어난 나와 할머니의 세계가 더욱 깊고 견고해지길 바라며, 나도 새로운 책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