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a L Jan 05. 2024

2023년을 보내줘야 2024년이 와요

중동에서 맞은 새해를 헬싱키에서 보내주었다



2024년 새해를 만난 지 5일이 지나가는 밤이다.

새로운 해를 맞아 세계 곳곳에서 떠들썩한 축하를 주고받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고, 2024년이라는 시간이 늘 우리 곁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이쯤 되어서 내가 어떻게 헬싱키 비기너가 되었는지 복기해보고 싶다. 2023년 한 해는 나에게 지리적으로, 관계적으로 참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 해다.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난 내 경험을 사랑한다. 원래 후회란 걸 잘 안 하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그 고생길이 없었더라면 지금 가지지 못했을 수많은 것들을 놓치면서도 그것들이 얼마나 값진지 알지도 못했을 테니.


나는 중동의 대형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첫 입사와 첫 독립을 생소한 나라에서 시작했다. 어릴 적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홀로 다녀온 경험도 있었고, 또 대학교 때 여러 이유로 휴학을 2년 남짓하며 홀로 여행도 곧잘 다녔던 나는 중동이라고 해서, 또 처음 듣는 나라라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중동을 얕잡아 봤다.

그리고 문화적 차이 또한 얕잡아 봤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싶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사느냐에 따라 참 다르더라.

그 '차이'가 긍정적으로 다가올지 부정적으로 다가올지는 본인의 성향과 또 본인이 얼마나 다른 것에 대해 수용을 잘하는 사람인가에 따른 것 같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홀로 생활할 당시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또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기질적으로 권태로움을 잘 느끼기에, 되려 오래 본 사람들 보단 새로운 사람들에게 늘 더 호감과 관심을 쏟기도 했다. 요즘 말로 극 E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3년 남짓 일을 하며 극 I가 되었다. 실제 MBTI를 검사해도 이젠 열 번 중 열 번 모두 I가 나온다.

'승무원이 내향적이어도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지만, '네.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 성격대로 일하는 건 아니잖아요? 승무원들도 똑같습니다.'라고 답한다.  

세상 외향적인 성격에서 내향적이고 집중적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으로 바꾼 것 이외에도 중동, 그곳에서의 승무원 생활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무엇보다, 고마운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나 사랑해 주고 믿어주고 또 힘이 되어준, 버티게 해 준 사람들을 넘치게 많이 만났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사람들은 늘 내 곁에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오면서 가장 온전히 사랑받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늘 내가 잘난 맛에 살고, 내가 잘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오만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대가 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응원 덕분이었다는 감사함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래서 30대를 디자인함에 있어서 조금 더 희망적일 수 있었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책,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나오는 구절처럼,

"넌 네 인생을 가지고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어. 단, 너 자신을 파괴하는 것만 빼고."

이 말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기고 나의 행복을 찾아 긴 여정일지 모를 여행의 채비를 하게 되었다. 조금 용기가 필요하긴 했다.




그 여행 끝에 헬싱키 비기너가 되었다. 특별히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의 환경은 끝에서 끝으로 변해온 것 같다. 모든 면에서.

믈론 안 좋은 변화도 있다. 북유럽 헬싱키가 유토피아는 아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 시간은 내 건데,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이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고 또 맛있는 음식과 술을 함께할 수 있다면 충분히 좋지 아니한가. 안 좋은 사람은 나도 안 좋게 대하면 된다. 어디서 많이 들리는 말처럼,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중동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받은 사랑과 얻은 인연들은 떠나 지지가 않는다.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사람들을 아마 나는 평생토록 잊지 못하지 싶다.

그러나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면 과거는 그만 놓아주는 대범함도 필요할 것 같다. 온전히 혼자가 되어 어려운 시간들을 견디며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선택과 결정들을 해야만 해서 많이 위축되고 지쳤던 2023년의 나에게도 수고했고, 잘 버텨줘서 너무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안녕을 고한다.

그래야 2024년의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행운 또 새롭게 다가올 나의 자리가 생기지 않겠는가.




작년 한 해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크고 작게 불행했거나 또 행복했던 모든 분들께 참 잘 버텨왔고 새해까지 와주어서, 이렇게 2024년이 되어 나의 글을 읽어주고 존재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2023년까지의 삶이 마지막이었던 생이 있었더라면, 이젠 육신이라는 틀에 영혼을 가두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 어딘가를 훨훨 날아다니며 생전에 붙잡혀 있던 모든 것에서 해방하셨길.

그리고 때로는 바람이 되어, 또 바다가 되어, 또 하늘이 되어 우리네 인생에서 자꾸만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시간의 곁에 조금이나마 함께 머물러주길 청원한다.

2024년 1월 5일 밤, 적어도 오늘 나는 행복했다.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따뜻한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나 자신을 위해 정성스러운 아침상을 차려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부모님께 안부를 전해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고, 나의 글을 읽어줄 누군가를 생각하며 글을 쓸 수 있는 권한이 있어 행복했다.

언젠가의 내가 이 글을 다시 들춰본다면 이 순간의 작지만 확실했던 행복을 잊지 않길 바란다.





이전 03화 마리메꼬와 이딸라와 무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