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은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보다 더 떨릴까? 배짱 좋게 예약까지 했지만 그녀는 일생일대의 기로에 놓인 기분이었다. 침착하게 오로지 사실만을 전하고 원장의 반응을 살피기로 한 채 예약자로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진료실에 들어섰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죄송한데 간호사분을 내보내주세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원장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키자 간호사를 내보내며,
"환자로 온 게 아니면 무슨 일로....."
그녀는 자신이 원장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임을 밝힌 뒤 자신이 없는 학부모 단톡에서 병원장 사모가 자신의 아이를 비하하고 조롱한 대화내역을 A4용지에 출력하여 그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 뒤 원장이 집중해서 읽을 수 있도록 입을 다문채 점점 일그러지는 원장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원장은 혼잣말처럼 했지만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코를 훌쩍이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건데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온 거예요."
병원장은 한 손에 종이를 구깃하게 든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묻기에 알려주고 돌아 나오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바빠서 아내를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원장의 사과를 외면한 채 그대로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 빈대를 직접 만나지 않고 남편을 만나 고소를 예고한 건 좀 치사했지만 보다 치졸하고 드럽게군건 병원 빈대였으니 자업자득이었다.
그녀는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 카톡 알림이 울렸다. 병원장이 토스로 돈을 보낸 것이다. 동그라미가 많아서 자세히 세어보니 천만 원이었다. 집에 오기까지 15분 남짓 걸렸는데 그 짧은 시간에 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보낸 원장을 보며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연이어 울리는 카톡. 그는 다시 한번 진정성 있는 사과의 메시지까지 보냈다.
그녀는 송금받기를 누르지 않은 채 병원장의 사과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사과문이었다. 의사가 글까지 잘 쓰다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뒤 송금받기를 눌러 자신의 계좌를 입력해 천만 원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돈을 받음으로써 고소는 없던 일이 되었음에 씁쓸했지만 창조경제에 이바지한 것 같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삼 개월 시녀 노릇과 아이를 향한 모욕적 언사가 천만 원에 무마된 것이 아쉬웠지만 명예훼손 고소로 합의금을 받아봤자 일이백만 원이란 걸 이미 알아봤기에 남는 장사였다.
그녀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만 원을 가지고 갈 곳을 떠올렸다. 가고 싶었으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로 그곳.
"가자. 에르메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