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의 눈앞에 기장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지속은 가족과 여름휴가를 왔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는데 그 옆엔 재밌는 시어머니도 함께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지속은 늘 여름휴가를 시어머니와 보냈다. 아기가 없던 신혼부부일 때도 셋이서 제주도를 갔으니 말 다 했지. 지속이 이 점이 불만인지 궁금하리라. 지속은 스스로도 불만인지 만족인지 혼란스러웠다. 그 이유가 이제 시작된다.
병히는 아난티 코브 정회원이었다. 회원권은 어디서 났을까? 시어머니의 결혼 선물이었다. 시어머니의 조건은 이랬다. 비싼 회원권을 선물하는 만큼 아난티에 갈 때는 본인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 지속은 항상 그렇듯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편의점에서 빵을 고르듯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고급 숙박 회원권인데 마다할 리가 있나. 그리곤 평생의 굴레, 휴가 중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시어머니는 워낙 까다로운 분이라 어딜 가도 불만이 많았다. 음식이 짜네 싱겁네, 양이 적네 많네, 비싸네 어쩌네. 지속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운 채 시어머니가 만족하실지 눈치를 봐야 했다. 무슨 휴가가 이러냐고. 쉬러 왔지 수발들러 왔냐고. 뷔페를 가면 어머니가 좋아하실 음식과 음료를 나르느라 지속의 식사는 뒷전이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어머니는 본인의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지속은 꾸벅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잘 먹었다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는 법. 지속은 자신의 밥값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남의 돈으로 먹고 놀고 사는 이의 도리였다.
그래도 왜인지 주변 친구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난티에서 찍은 사진을 프사로 올리면 친구들에게 부럽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속은 뭐가 부러워 우리도 자유 부인되면 놀러 가자. 나도 준회원이거든. 으스대며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지만 그건 잠시일 뿐. 시어머니도 여기 같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도 있다고 하는 순간 모두가 쯧쯧쯧 혀를 차며 지속을 안타까워할 것을 알기에 지금껏 꼭꼭 숨기며 시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각도로만 사진을 찍어 사수한 자존심이었다.
2박 3일의 휴가 동안 지속은 단돈 십원을 쓰지 않았다. 식사비, 아이들 기념품, 간식비, 숙박비까지 모두 시어머니 지갑에서 나왔다. 이 정도면 지속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의 휴가에 지속이네가 더부살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속은 자신의 이런 상황이 불만인지 만족인지 헷갈렸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추억이 없는 지속은 원이와 진이는 여름마다 할머니와 여행한 추억이 쌓일 거라고 그거면 됐다고 만족 쪽으로 마음을 굳혀갔다. 그런데 한 번씩 기분이 팍 상했다. 시어머니는 꼭 1인당 4만 원이 넘어가는 식사를 할 때면 지속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들 병히한테 시집오는 여자는 땡잡는 거라 했는데 지속이 너였구나. 네 복이다."
그럼 지속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대게를 먹으러 갔을 땐 병히가 챙겨준 살이 꽉 찬 집게발을 흡입하는 지속을 마른 게다리를 쫍쫍 빨며 말없이 주시하기도 했다. 한우 구이를 먹으러 가서는 아직 고기를 덜 먹은 지속에게 자꾸 된장찌개와 공깃밥을 먹자며 고기를 추가하는 병히에게는 별말을 않던 분이었다. 왜인지 시어머니가 사주는 비싼 밥이 삼십 년 된 낡은 빌라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찬밥에 김치만 못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눈칫밥의 맛이 이리도 쌉쌀했던가. 나름 성공한 취집러 지속의 민낯은 이랬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끌끌 혀를 차고 계시는지...
지금 지속은 숙소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다. 워터하우스에서 실컷 물놀이를 한 두 딸은 이른 잠에 빠졌다. 시어머니는 맞은편 침실에서 누군가와 시끄럽게 통화 중이다. 지속은 어둠이 내린 창문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행복한 거 맞지? 이거 시집살이 아니고 휴가 맞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