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은 연애 4년, 결혼생활 6년 도합 십 년을 병히와 함께 했다. 긴 시간을 함께 했어도 병히는 지속에 대해 쥐뿔도 몰랐다. 뭘 몰랐을까. 지극히 지속의 입장에서 섭섭했던 일들을 써보려 한다.
지속은 첫 연애의 백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오랫동안 고민했다. 잊히지 않는 의미 있는 선물을 병히에게 하고 싶었다. 그 순간 지속이 좋아하는 조니 뎁의 영화 아리조나 드림이 떠올랐다. 여주인공이 조니 뎁에게 세상을 다 주고 싶다며 지구본을 선물하는 장면을 보며 지속은 언젠가 남자에게 써먹겠다고 다짐했다. 이 얼마나 로맨틱한가. 세상을 다 주고픈 남자라니.
지속은 심사숙고해서 고른 예쁜 지구본과 촉촉 말랑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가득 채운 연애편지를 병히에게 선물했다. 선물 받은 병히가 정말 행복한 표정이라 지속도 행복했다. 얼마 뒤 병히네 집에 놀러 갔는데 지속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정말 실망했다. 지속이 선물한 지구본이 뒤집어진 채 바구니에 반쯤 삐져나와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다 주고 싶다는 엄청난 의미가 담긴 선물을 저렇게 보관하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연기한 건가. 지속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쏟아졌다. 기분이 상해 병히의 질문에도 뾰로통하자 병히가 왜 그런지 물었고 지속은 말없이 뒤집어진 지구본을 가리켰다.
"아, 그건 잠시 둔 거야. 나중에 제대로 전시하려고."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그래서 마음을 풀고 넘어갔는데 지구본은 단 한 번도 바구니에서 나와 똑바로 세워진 적이 없었다. 마치 지속의 뒤집어진 속처럼.
지속이 정말 싫어하는 병히의 습관이 있는데, 대화 중 딴짓을 하며 경청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 번씩 지속은 병히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방금 한 말을 묻는 기습 퀴즈를 냈는데 틀리면 혼구녕을 내서 버릇을 고칠 요량이었다. 헌데 신기하게도 다 맞추는 것이 아닌가. 병히는 다 듣고 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지속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경청의 태도를 원했다. 적어도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면 충분한데 병히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속의 말에 대충 응응, 그래그래 했다. 뭐가 응이고 뭐가 그래야? 물으면 똑바로 대답은 잘했기에 지속의 말문은 턱 막혔다.
남중, 남고를 졸업한 병히에게는 대학교에서 만난 여자 사람 친구들이 있었다. 이성친구가 전혀 없던 지속은 그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연애시절 병히가 여사친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그날 병히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지속에서 다른 사진으로 바꾸었다. 지속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병히가 진짜로 사랑하는 건 여사친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친구로라도 남고 싶어 말도 못 하고 절절한 외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럼 나는 뭐지? 꿩 대신 닭?! 그래. 그래서 사진을 바꿨구나. 지속은 분노에 휩싸였고 늦은 밤 병히에게 전화를 걸어 왜 프사를 바뀠는지 물었다. 병히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꿨다고. 지속은 여사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며 이들 중 누가 너의 짝사랑의 대상이냐고. 내가 꿩 대신 닭이냐 물었더니 병히가 황당해했다. 걔들은 이성적인 호감이 전혀 없는 애들이라고. 또라이들이라 웃겨서 한 번씩 보는 거라고 꿩 대신 닭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억울해했다. 그래 놓고 병히는 그 후 지속이 싫어하는 여사친들을 몰래 두어 번 더 만나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지속이 이별을 고하자 빌면서 그제야 여사친들의 연락처를 모조리 지웠다.
요즘 들어 좀 아쉬운 건 병히의 여사친들 중 한 명이 인플루언서로 요리책도 내고 대학 강의도 하고 유명인들과 방송까지 하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황금인맥이 되었는데 병히와 연락이 끊겼다는 것. 지속이 좋아하는 개그우먼이 그녀의 인스타에 댓글을 쓰는 등 아주 잘 나가는데 지속은 그때 병히를 밟고 그녀와 인맥을 쌓아 놓을걸 후회했다. 이렇게 크게 성공할 줄 알았나? 남편의 새파란 람보르기니에서 셀카를 찍어 올린 그녀. 나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이미 늦어서 안 되겠죠??
그리고 또 하나, 병히는 다른 사람과 했던 걸 지속과 했다고 착각을 자주 했다.
"우리 그때 이 식당에 왔었잖아."
지속은 처음 온 곳이었다. 어떤 년이랑 와보곤 나랑 헷갈리는 거야? 오늘 향냄새 한 번 맡아볼래? 병히에게 쏘아붙이면 병히는 아, 엄마랑 왔었구나 하며 지속이 더는 험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방어했다. 탈룰라는 선 넘는 거지. 지속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여우 같은 놈.
병히는 172센티에 270미리 신발을 신고 105 사이즈 옷을 입는다. 빨간색을 좋아하며 가수는 박지윤을, 배우는 조여정을 사랑한다. 아직도 90년대 댄스음악을 심취해 들으며 배워도 늘지 않는 테니스 실력을 가졌다. 자신의 차를 마누라보다 더 아끼고 최근 현대미술에 빠져 신진 작가의 그림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대가 이배 작가를 좋아하는데 그의 작품을 살 돈은 없기에 사진으로만 감상한다. 골프도 배우는데 치는 자세가 망아지 같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좀비물 광팬이다. 과일은 딸기, 복숭아를 좋아하고 육식파이며 계절은 여름을, 딸들의 짭조름한 땀냄새를 맡는 걸 좋아한다.
지속은 이렇게나 병히를 속속들이 많이 아는데 그는 지속을 조금도, 쥐뿔도 모른다니.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