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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갓 마더 지속이 편

by 이지속

지속은 순백의 이불을 덮은 채 전혀 붓지 않은 얼굴로 병히가 가져다주는 갓 뽑은 커피 냄새를 맡으며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싶었다. 현실은? 진이의 발차기에 코를 맞곤 별을 보며 눈을 떴다. 지속은 시큰한 코를 감싸며 코피가 나는지 만져봤는데 다행히 코피는 나지 않았다. 다음번 발차기는 정통으로 맞아 코뼈가 부러져 그 참에 한가인 코로 성형수술을 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녁 8시에 잠들어 새벽 6시에 기상하는 부지런한 두 딸이 휩쓸고 지나가 거실은 이미 폭탄을 맞았다. 7시에 발차기로 지속을 깨운 진이가 아니었다면 10시까지 세상모르고 잤을 텐데 지속은 참고로 사회생활을 할 때도 오후 2시 출근이라 11시까지 잠을 늘어지게 잤더랬다. 아, 꿈같은 시절이여. 20개월이 된 진이는 지속을 보자 밥! 김! 을 외치며 아침을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진이는 공복을 견딜 수 없는 먹둥이었다.

지속의 두 딸 원이, 진이는 빙초산 같은 병히의 유전자를 지속이 희석하여 딱 새콤한 사과 식초로 만들었기에 얼굴에 병히가 있었지만 예뻤다. 똑같은 원피스에 똑같은 신발을 신겨 머리를 말끔하게 묶여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인형처럼 예쁘다고 난리였다. 카페를 가면 딸들 덕에 공짜 서비스를 더 받았다. 식당을 가면 일하는 이모, 삼촌들에게 눈웃음을 치고 애교를 떠는 딸들 때문에 본인들이 먹으려고 사둔 과일까지 후식으로 받을 정도였다. 지속은 노키즈니 뭐니 아이를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경계했는데 감사하게도 혼자일 때보다 아이들과 있을 때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받았다. 유모차를 밀고 나가면 나서서 문을 잡아 주는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도 늘 양보를 받았다.

인간이 지긋지긋했던 지속은 말도 안 되게 두 인간을 탄생시키고서야 비로소 인간애를 느꼈다. 뭔 짓을 해도 고치지 못하던 인간 혐오증이 사라진 것이다. 불치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낯선 타인의 배려가 이리도 고마운지 몰랐다. 그래서 되갚고 싶었다.

결혼 전 노키즈 존만 다니고 실수로 다가와 부딪힌 아이를 흘겨보던 지속이었다. 세상에서 인간이라면 어리든 젊든 늙었든 모조리 싫었는데 그래서 늘 날이 서고 표정이 사나웠는데 그런 그녀가 딸들과의 외출에선 만인을 사랑으로 품은 갓 마더가 따로 없었다.

비비탄을 쏘며 격하게 노는 사내아이를 보면 인자하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나중에 군대 가면 실컷 쏠 텐데 망나니 새끼들이라며 악담을 했을 터였다. 위층 아이가 발망치로 쿵쿵거리면 녀석 두 다리가 건강하구나 잘 크고 있네. 허허허 웃으며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아이의 흥분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예전엔 쫓아 올라가 시끄럽다고 따지고 그래도 여전히 쿵쿵거리면 윗집 인간들 발목을 전기톱으로 썰어 버리는 상상을 하며 분노했다. 살벌한 상상을 하다 잠들어서였나. 그 시기 지속은 꿈자리가 인상처럼 사나웠다.

그랬던 지속이가 엄마가 되더니 만인을 만물을 자연스럽게 품게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차마 수치로는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그래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크.. 지속이가 달라졌다. 그런데 유일하게 여전히 싫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남편 병히. 왜 병히에겐 늘 화가 나는지 일평생 유일하게 좋아한 남자인데 어째서 결혼 후 그가 지긋지긋한지 지속은 의문이었다.

퇴근 후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실실 쪼개며 폰 게임을 하는 병히의 뒤통수를 진짜 세게 때리고 싶었다. 아니면 명치를 주먹으로 갈기던가. 이유가 있냐고요? 굳이 찾자면 못생겨서?

솔직히 이유가 없었다. 그냥 얄미웠다. 결혼은 무엇이기에 지속이 사랑한 듬직한 남자 병히를 저런 팔푼이로 만든 것일까. 이게 병히의 본모습인가. 결혼하고 싶어 거짓으로 연기를 한 걸까. 지속은 배를 까고 넓적다리를 긁는 병히를 보며 다시 한 번 비혼 주의자를 꿈꿨다. 결혼은 두 딸을 얻은 것 말곤 좋은 게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아무나하고 애를 만들고 혼자 키워도 될뻔했다고. 결혼이란 제도는 지속과 맞지 않았다.

그런데 원이 진이는 아빠 바라기였다. 지속은 병히가 없어도 됐는데 딸들은 아니었다. 병히가 퇴근하면 지속은 오던가 말던가 하던 일을 했고 두 딸들은 아빠다! 하며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 병히에게 안겼다. 그럼 병히는 봉기가 어린 지속에게 그랬듯 아이들 볼을 거칠한 턱으로 마구 비다 두 딸을 안아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지속은 차마 이 생에서는 되지 못할 비혼을 꿈꾸기만 했다. 원이 진이도 나중에 지속처럼 아빠의 냄새를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억하게 될까? 성인이 돼서도 힘들 때 아이처럼 아빠 앞에서 울까? 혼나지 않으려 말도 안 되는 들통날 거짓말을 할까? 삶의 힘든 시기에 아빠의 얼굴을 떠올릴까?

지속은 그럴 거라고.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제 지속에게 크나큰 인생의 과제가 주어졌다. 총을 쏘고 발망치를 두드리는 아이들처럼 이해와 사랑으로 남편 병히를 품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가.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잠이 든 병히는 지속의 이런 속내를 까맣게 모르고 퍼져 자고 있다.

지속은 내일은 우아하게 아침을 맞이 하고 싶다고 병히가 프렌치토스트와 딸기잼, 커피 한 잔을 트레이에 받쳐 침실에서 자는 지속에게 가져다주며 깨우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다.

부디 이 소원이 이뤄지기를. 내일이 안되면 모레라도 글피도 좋다고 아니, 이번 생에 단 한 번이라도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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