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를 결혼 생활
내가 문제인가? 네가 문제인가? 편
십 대 지속은 대학만 가면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다. 실상은? 수능을 망쳐서 친구 무리 중 혼자만 지방대를 다니며 인서울 대학생의 못 이룬 한을 품었다. 지방대생이란 이유로 의대생을 소개받지 못해 악에 받친 건 아니었다. 지속만 빼고 자기들끼리 서울 여기저기를 놀러 다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는 등 지속 홀로 배척당하는 기분이 들어 서러웠을 뿐.
이십 대의 지속은 결혼으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초딩들에게 알파벳과 기본 단어만 가르치며 영어 강사라고 대외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쪽팔렸기에.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그와 가정을 꾸려 강사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모님 소리를 듣고 살고 싶었는데 실상은? 사모님은 무슨. 애기 엄마 소릴 들으면 양반이었다. 모두가 지속을 저기요 아줌마라고 불렀다.
지속의 삶은 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기우는 결혼으로 나름 성공한 취집러였지만 지속은 여전히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병히 덕에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얻어 타며 가격 고민 없이 옷을 사고 먹고 싶은걸 마음껏 먹었지만 그뿐이었다. 빈털터리 개털이었다.
지속이 누리는 것들은 병히와 이혼하면 사라질 병히의 것이었다. 병히가 혼외 자식이라도 만들어와야 위자료로 목돈을 좀 만질까. 한 번씩 지속은 자신도 뭔가 두 손 가득 든든하게 움켜쥐어봤으면 바랐다.
결혼생활은 지속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지속이 가진 미약하고 작고 소중한 것을 빼앗아갔을 뿐. 작고 소중한 지속의 가슴은 모유 수유로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다. 미약하게나마 미인 소리를 듣고 살았던 지속에게 이젠 그 누구도 미인이라 칭하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았던 체형은 주 2회 피똥 싸는 운동으로 겨우 유지가 됐으며 종종 만나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던 고향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혼은 지속이 가진 체력을 모조리 쓰게 만들어 고갈시켰다. 병히 그리고 두 딸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소홀하게 만들었으며 보통의 여자들이 그러하듯 가정에 희생과 헌신을 강요받았다.
"일도 안 하면서 애들 어린이집 일찍 보낼 생각 말아라."
누구에게 들은 소릴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아시죠?
"병히 아침 식사 챙겨라. 쟤가 살찌는 건 네가 아침을 안 챙겨서 점심에 과식을 해서 그런 거다."
이것도 아시겠죠?
일평생 지속을 낳아 기른 부모에게도 듣지 못 한 말들을 남의 부모에게 듣고 초연하게 넘겨야 하는 거지 같은 상황은 누가 만든 것일까? 내가 만들었나? 아님 너?? 지속은 결혼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이 정도면 지속은 이름을 이지긋지긋 이라고 개명해야 할 판이었다.
집 안의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지속의 손길만을 기다렸다. 병히, 두 딸, 반려견 뽀리 그리고 네 개의 화분. 지속은 이들 중 화분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돌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왜냐면 지속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는데 아무도 지속을 살피지 않았기에. 지친 지속은 화분에 물을 주지 않고 죽여서 주 1회 물 주기에서 만큼은 해방되고 싶었다.
지난 5년을 키운 식물인데 이름도 몰랐다. 이름을 몰라두길 잘했다고 죽이는 것에 하마터면 죄책감을 느낄 뻔했다. 그렇게 3주를 물을 안 줬는데 바짝 말라죽거나 시들었어야 하는 화분이 멀쩡했다. 지속은 자신이 그동안 조화에 물을 주며 키웠나 싶어 등골이 서늘했다. 자세히 살폈는데 진짜 식물이 맞았다. 지속은 병히에게 한 번씩 화분에 물 주는 것도 지겹다고 다 죽여 버리고 싶단 살벌한 소릴 했었는데.... 화분 흙을 만져보니 촉촉했다. 병히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지속은 식물 죽이기를 관뒀다. 네 개 중 하나는 결혼 후 시어머니가 사 오신 것이고 하나는 원이가 태어난 축하 선물로 병히의 테니스 코치가 준 것이었으며 작은 화분 두 개는 신혼집을 꾸미려 지속이 꽃집에 가서 사 온 것이었다. 이 화분들로 신혼집을 채울 땐 지속도 행복을 그렸는데. 정확히 어떤 모습을 그렸는지 기억은 안 났지만 분명한 건 지금 지속의 상황은 아니었다.
지속은 더 이상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도 그리지도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크면 된다고. 엄마란 원래 희생하라고 있는 존재니 받아들이라고. 지속은 오늘도 병히와 두 딸, 반려견 뽀리를 돌본다. 네 개의 화분에 물도 줬다. 죽이려 한 게 미안해서 깨진 달걀 껍데기까지 흙 위에 놓아줬다.
삶은 원래 이런 거라고. 멈추려 해도 큰 돌부리를 만나지 않는 이상 이렇게 굴러간다고. 지속은 그렇게 멈추고 싶지만 멈추지 못한 채 데굴데굴 데구루루 구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