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36년을 사는 동안 내가 이토록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관식이 처럼 하루에 몇 마디 하지 않는 극도로 과묵한 스타일도 아니고, 어찌 되었건 카메라나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을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으니 보통 사람들처럼 적당히 외향적인 줄 알았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인간관계라는 것을 맺으면서 내 안에 숨겨진 내향성이 삐걱삐걱 마찰음을 내기 시작했다. 함께 있을 때보다 홀로 있고 싶은 시간이 많아졌고 무작정 냅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많아졌다. 그제야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번 연재글을 써가며 대한민국의 30대 남성으로 살고 있는 지금부터 내가 태어나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 영유아기까지의 삶을 역추적했다.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사회에서 나는 일생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순간이 불편해서, 안 친한 친구의 연락이 부담스러워서, 내게 말 거는 택시 기사님이 불편해서 늘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도망칠 용기를 내는 것보다 '네네'라는 중첩된 대답으로 거짓 긍정을 하고 어설픈 미소를 짓는 게 더 익숙했던 삶이었다. 사람과 연계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해 어디 산속에라도 들어가 혼자 살았으면 싶지만 속세를 벗어나선 돈 벌 길이 없으니 먹기 싫은 음식을 꾸역꾸역 구겨 넣듯 살아왔다.
'아무리 낯을 가려도 싹싹하게 굴어야지 일을 더 따오지'
'누군 다 성격이 좋아서 넙죽거리고 사니?'
'넌 예의는 바른데 서글서글 하지를 못해'
세상은 나에게 외향인이 되라고 아우성을 쳤고 나 또한 그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나 자신을 쥐어짜봐도 '네네' 이상의 싹싹함도 넙죽거림도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세상대로 외향적으로 바뀌지 않는 나를 채근하고 나는 나대로 꼼짝 하지 않는 지독한 내향성에 피로해져 갔다. 지쳐갈수록 내 안의 에너지는 점점 바닥이 나고 나를 싫어하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내가 조금 더 성격이 수더분하고 활발했으면 사회적으로 더 성공했을까, 지금 보다 더 돈을 많이 벌었을까. 의미 없는 상상의 끝엔 언제나 자책만이 남았다.
수많은 성찰과 자책의 시간을 돌고 돌아 나는 결국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내향적인 게 잘못도 죄도 아니건만 세상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나를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아졌다. 타고나길 지독하게 내성적인 성격을 죽어라 뜯어고쳐서 내가 아닌 페르소나로 사는 삶이 행복하지 만은 않으리라 싶었다.
내성적이어서 오해를 받는 대로, 손해를 보는 대로 감수하고 살기로 했다. 어쩌면 이 결심은 그토록 나를 외향적으로 바꾸려 했던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소심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외부와 단절을 하고 독고다이를 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굶어 죽을 일이 없도록 앞으로도 내 선에서 최선의 외향성을 발휘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는 어설프고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내가 가진 외향성의 최대치일 것은 분명하다.
더욱 내향(內向)적으로 살기로 했다. 세상이 강요하는 방향이 아닌 내 마음 안쪽의 방향에 좀 더 귀를 기울이며 살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은 먹어도 순간순간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고 고민하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삶의 기준은 가장 나다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일 것이다. 이 삶의 운전대를 다른 이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다.
아름답다는 우리말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아름'이 '나'라는 의미이므로 곧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다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은 언뜻 생각해 보아도 맞는 말이니까.
당신이 가진 성향이 내향적이건, 외향적이건 상관없다. 당신의 시선이 언제나 저너머 세상을 향해있기보다는 오롯이 당신의 내면을 향해 있길 바란다. 그 마음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가장 나답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내향성도 외향성도 모두 당신을 표현하는 색깔일 뿐.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도, 잘못도 아니니까.
'내향적인 게 죄는 아니잖아'
완결
[에필로그]
첫 번째 연재작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이 브런치 안에서 99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은 것에 감사했지만 저의 글이 가진 본질적인 힘이 아닌 극적인 상황과 자극적인 소재가 독자 여러분들의 흥미를 산 것이 아닌지 늘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연재였던 '내향적인 게 죄는 아니잖아!'에서는 보다 힘을 빼고 어딘가 슴슴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이 연재로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야겠다는 욕심도 내려놓았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매력을 알고 나면 자꾸 손이 가는 평양냉면 같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연재를 해온 지난 14주 동안 예상보다 많은 독자 분들이 저의 내향적인 이야기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별 것 아닌 내향인의 일상과 생각이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 공감과 위로가 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소재도 우리 모두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풀 꺾인 채로 힘을 빼고 쓴 글도, 너무나 사적인 것 같은 나의 이야기도 나름의 잔잔한 파장으로 넓게 퍼져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생각과 경험은 제가 쓰는 글의 주원료이기 때문에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론 도망치고 싶었고 지극히 사적인 생각을 활자로 풀어놓기까지 용기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매주 1편씩 연재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글을 통해 나를 더 쏟아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에세이를 써온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결국 작가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글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좀 더 다양한 장르와 시각을 담은 글에 도전해봐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시점입니다. 출간의 꿈은 간절하지만 여전히 머나먼 꿈처럼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언제고 쓰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쓰는 일이 내게 한 푼 벌어주지 못하더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죽고 싶은 날에도, 저는 끝내 메모 몇 줄이라도 쓰는 사람이더라고요. 이 작업이 자기만족으로 끝날 지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계속 쓰려합니다. 글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나다운 방법이자 저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작업이니까요. 앞으로도 글을 통해 그려가는 저의 모습, 그 살아있는 기록에 귀 기울여 주세요. 늘 따뜻한 마음으로 응원해 주시는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유이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