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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보다 믿고 사는 장남

우울증이 극심했던 이십 대 초반, 한 대학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심리검사를 받게 되었다. 나의 정신 상태를 면밀하게 체크하고 분석하는 평가였는데 이때 전문가는 가족 내 나의 위치를 이렇게 서술했다.


'가족의 심리적 가장'  


가장이라 함은 보통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제적 가장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가족 구성원을 정신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고 해결사를 자처하는 경우를 심리적 가장이라고도 하는 것 같다.


물론 나의 경우는 내가 벌어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움에서는 빗겨나가 있었지만, 일생 엄마에겐 남편 노릇을, 여동생에게는 애비 노릇을, 아빠에게는 해결사 노릇을 해야 했던 고충이 있었다.


아빠가 사업을 말아먹었을 때 뒷수습을 하고 다닌 것도 나였고, 아빠가 바람이 났을 때 엄마 대신 불륜남녀를 족치고 다니던 것도 나였으며, 동생이 휘청일 때마다 악역을 자처하며 바로 잡아줘야 했던 것도 나였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가족 개개인에게 다르게 인식되는 것 같다. 엄마에게 나는 그녀 인생에 변수나 곡절을 만들지 않는 유일하게 믿는 구석, 아빠에게 나는 어렵고 버겁지만 밖에 나가서 자랑하고 싶은 자식. 동생에게 나의 존재는 틀린 소리는 안 하지만 가까이하기엔 벅찬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라고 매번 핏대 올려가며 쓴소리 하는 역할, 전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내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너는 걱정이 안 된다, 너는 원래 알아서 잘하는 애니까'


애초에 걱정 따윈 끼치지 않고 원래 알아서 잘하는 아이는 없다. 그저 일찍 어른 아이가 되어서 때로는 스스로를 옥죄고 진짜 나 다움을 버리고 노력하며 살았을 뿐. 의연한 척에 도가 튼 나의 연기가 수준급이어서 일까 아니면 온 가족이 나는 그저 잘 견뎌내고 버티는 사람으로 편리하게 믿고 싶은 것일까.


가끔 나는 궁금하다.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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