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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우리 집은 실로 하루아침에 처참하게 망했다. 애초에 조상에게 받은 밭떼기 하나도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 비법 하나도 없는 볼 거 없는 집안이지만 아빠는 사업을 해서 30대 초반에 꽤나 돈을 만졌다. 그게 본인의 능력이었는지 경제 호황을 타고 초년 운을 탈탈 써버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본인이 벌어서 30대에 강남권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나와 여동생을 미국 유학도 보낼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 아빠는 평생 해온 사업을 화끈하게 말아먹었다. 사업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돈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냉철해야 하는데 이 양반은 애초에 사업을 하기에는 MBTI F 기질이 넘치는 허당이라 천운이 지속되지 않는 한 어차피 한 번은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사람 팔자 끝까지 살아보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였는데 나도 내 입으로 이렇게 우리 집이 쫄딱 망했다고 글을 쓰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다.


우리 집이 망했다는 사실은 지난 15년간 내가 죽을 만큼 숨기고 싶었던 얘기였다. 알량한 자존심에 주변 사람들한테 무시당할 것 같았고, 집이 망한 사건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을 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으며, 카메라 앞에서 얼굴과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직업 때문에라도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우리 집이 망한 지 어느덧 15주년. 살다 보니 일정 부분 회복된 것도 있지만 삶은 여전히 고되고 막막하다. 그런데 문득, 이 이야기를 세상에 속 시원하게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이야기는 집이 망하고도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한 일화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죽기 살기로 치열하게 살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생존수기에 가깝다.


그럼에도 내가 지난 세월을 여러분들에게 과감하게 꺼내 보이려 하는 것은, 한때 매일 죽음을 기도했던 내가 여전히 매일을 '살아내고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이 세상 쫄딱 망한 집 가족들이 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때로는 공감하고 위안을 받으며 오늘을 살아내었으면 좋겠다. 죽음 밖에는 떠올릴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라도, 살다 보면 그래도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각자 다르겠지만 결국엔 우리 모두 이 고난의 생존자가 되어 정말 언젠가는 이 고통의 시간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열광했다. 나도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면 참 좋았겠다만 내 현실은

"쫄딱 망한 집 첫째 아들"


막장 드라마 보다 더 마라맛이었던 나의 15년간의 생존수기.

지금, 여러분께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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