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이모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동은 달랐지만 걸어서 2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엄마와 달리 이모는 다소 호들갑스럽고 외향적인 성격의 여자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은 사업을 해서 아쉽진 않게 살고 있었고 이모부는 세무공무원이라 경제적 여유는 우리 집이 조금 더 나았던 것 같다.
우리 집은 내가 중학생 때 더 좋은 학군으로 이사했고 뒤이어 내가 고등학교 때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이모와는 거의 교류가 없어졌다. 이모를 몇 년 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은 우리 집이 망하고 오래된 상가 건물 꼭대기 집에 살 때였다. 폐허 같은 집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모를 맞이해야 하는 현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 사이 우리 집과 이모네 형편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우리 가족이 월셋집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고 있을 때 이모부는 세무사무소를 차려 꽤나 돈을 벌었던 모양이었다. 이모네는 갑자기 강남에 대형 평수 아파트로 이사도 하고 재수한 아들도 해외 유학을 보낸 후 회사도 차려줬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즈음 내 여동생은 4수 끝에 본인이 희망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문제는 등록금이었다. 사고는 아빠가 쳐도 돈을 꾸러 다니는 것은 늘 엄마 몫이었듯이 그때도 엄마가 막내 외숙모와 이모에게 돈을 융통해 겨우 입학금을 마련했다.
이때 군대에 있던 나는 극심한 우울증을 철저히 숨기고 복무 생활을 하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군대 지휘관들에게만 내 상황을 얘기하고 부대원들에게는 모든 것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대학병원 정신 병동에 입원했다.
내 공식적인 병명은 중증 우울과 불면, 자살사고였다. 까딱하면 스스로 죽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태인데 병동에 입원 수속을 할 때도, 퇴원할 때도 난 늘 혼자였다. 엄마는 식당에서 서빙하고, 아빠는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팔고, 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8인실 병동에서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숨이 타들어 갈 정도로 간절하게 죽고 싶던 시기였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퇴원하게 되었는데, 정산하지 않으면 병원 밖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온 가족이 가지고 있는 통장을 탈탈 털어도 도저히 백만 원이 넘는 입원비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그래도 올케보다는 가깝다고 생각한 이모에게 입원비 융통을 요청했다. 예전에 여동생 입학금을 갚았듯이, 백만 원만 빌려주면 매달 일정 금액씩 갚겠다는 것이었다.
"언니 안될 것 같아"
아직도 이모의 문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이 문자를 마지막으로 이모는 우리 가족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입원비를 빌려준 사람은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엄마와 같이 보쌈집에서 일하는 조선족 순정 이모가 거두절미하고 백만 원을 빌려주었다. 사람이 정말 힘들 때는 가까운 사람보다 이렇게 의외의 사람이 나를 살리기도 한다.
이모가 우리를 도와줄 의무는 없다. 이모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그녀를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엄마 말마따나 애초에 돈 빌릴 상황을 만든 우리가 잘못이다. 돈 빌려 달라는 소리에 반색할 사람은 아마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이모는 공평하게도 그녀의 형제 중에서 쫄딱 망한 두 집하고만 손절했다. 젊어서 형제들을 다 뒷바라지하고 노년에 망한 큰외삼촌 댁과 우리 집이 그녀의 인맥 리스트에서 아웃되었다. 현재 이모가 형제 중에 가장 가깝게 지내는 집은 집안에서 가장 부유한 막내 외삼촌네인 것을 보면 때로 돈은 피보다 진하다.
그 후로 10년 후, 느닷없이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아들이 결혼하니 참석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우리 집에 인심을 좀 더 쓴 것이 분명하다. 큰 외삼촌 댁에는 아들 결혼한다고 문자 한 통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