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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파트 홀랑 날려먹었습니다

망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 작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 갈 때의 그 비참함을.

내가 진짜로 망했다는 것을 뼈가 시리게 체감하는 순간이 바로 주거 공간의 변화를 겪을 때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보니 유년 시절을 보냈던 아파트는 이미 남의 명의로 넘어간 지 오래였고 우리 집은 쓰러져가는 노후 상가 건물 꼭대기 층으로 쫓겨나 있더라.


그 집 앞에 처음 발을 내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택시 기사가 우리를 엉뚱한 목적지에 잘못 내려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이 우리의 첫 번째 월셋집이었다. 1층에는 곱창집과 전집이 밤낮없이 장사하고 2층에는 미스테리한 노작가의 서예 화실이 있는 낡고 더러운 상가 건물. 그리고 그 꼭대기에 마련된 네 식구의 방공호.      


집이 좁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애초에 집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구조였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쪽방만한 방이 하나 있고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복도를 나오면 안방과 부엌, 그리고 건넌방이 있는 구조인데 이 좁은 공간에 어거지로 방을 세 개나 만든 것도 참 재주다 싶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집의 히트는 화장실이었다. 천장이 세모로 기울어진 조각난 공간에 세면대랑 변기를 구겨 넣은 상태였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이 몸을 씻을 공간이 아니라 대걸레를 빠는 공간으로 만들었겠다 싶었다. 학교 때 지진이 나면 책상 아래로 숨으라고 배웠는데 키가 180cm나 되는 나는 씻으러 갈 때마다 지진 대비 훈련을 하는 것처럼 몸을 실컷 굽혀야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에 늘상 납작 엎드려야 했던 것처럼.     


무엇보다 이 화장실에서 나를 돌아버리게 했던 것은 눈물 나는 수압이었다. 워낙 노후화된 상가 건물이다 보니 우리가 사는 꼭대기 층까지 수압이 올라오지 않았다. 세면대 물은 어찌어찌 나와도 샤워기 물은 90살 먹은 할아버지의 오줌발처럼 감질나게 흘러 부아가 났다. 그나마 샤워가 가능할 정도의 수압을 끌어올리기까지 물을 틀고 20분은 기다려야 했으니 내 몸뚱이 하나 씻는 데에 이토록 인내가 필요한지 그때 처음 배웠다.


나오라고 하는 곳의 물은 안 나오고,

나오지 말아야 할 곳의 물은 나오는 것이 이 집이 가진 고약한 점이었다. 

장대비가 퍼붓던 어느 밤, 문간방에서 자던 동생이 거실로 나와 소리를 질렀다. 천장에서 빗물이 줄줄 새고 있었는데 어느새 창가 쪽으로 빗물이 꽤나 차올라 자칫하면 온 방 안이 비에 잠길 뻔한 것이다.  


집이 망하고도 부모한테 모진 소리 한번 한 적 없던 동생도 이게 뭐냐며 울고 불다 집을 뛰쳐나가고 당황한 엄마 아빠는 비가 오는 걸 어쩌라는 거냐며 되려 어깃장을 놓고 빗물을 퍼내던, 한여름 밤의 물난리.


창문 너머로는 곱창집 간판 불빛이 커튼을 뚫고 들어와 밤잠을 이룰 수가 없고 늦은 밤 귀가할 때면 취객들이 상가 출입구에 노상방뇨하느라 내가 내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우리의 첫 번째 대피소.      


대한민국 도처에 깔린 게 아파트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집은 없다.

이 세상 어느 등기부등본에도 우리 가족 명의는 없다.

우리는 이제 집주인에게 매달 월세를 바쳐야 하는 세입자가 되었으니까.


버스에 앉아 창문 너머 남의 아파트 베란다를 구경하면서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삶이 따습고 윤택할까 혼자 자격지심에 빠지기도 하고, 어린 마음에 가장 만만한 엄마에게 온갖 독한 소리로 원망을 게워내던 나의 스무살은 참 쓰라렸다.


그 후로 우리는 결국 서울에서 쫓겨나 난리통에 피난 다니듯 서울에서 더 멀고, 더 싼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다. 매달 가계 수입에서 가장 큰 지출을 월세로 내고 있으니 전세 보증금을 모으거나 소액 적금을 드는 것은 사치요, 네 식구가 굶지 않고 먹고살기에도 빠듯했다. 온 가족이 아무리 벌어봐야 월세살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숨이 차게 죽어라 뛰어도 마치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처럼 제자리 달리기만 하는 느낌이랄까. 

살기엔 고통스럽고 차마 죽을 수도 없는 생지옥.

네 사람의 인생 앞에 지옥문이 우리를 향해 환영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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