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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파트 홀랑 날려먹었습니다

망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 작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 갈 때의 그 비참함을. 내가 진짜로 망했다는 것을 뼈가 시리게 체감하는 순간이 바로 주거 공간의 변화를 겪을 때이다.     


사업이 망하자, 엄마 아빠는 강남 아파트를 날려먹고 순식간에 지하방으로 쫓겨났다. 그때 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자식들을 도저히 지하방에서 살게 할 순 없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내가 귀국할 즈음 오래된 상가 건물 꼭대기 집으로 이사했다. 유년 시절을 보낸 아파트에 마지막으로 가 보지도 못한 채 쫓겨난 현실이 서글펐지만, 어떻게든 자식들을 지하방에서 탈출시킨 부모를 떠올리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월셋집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원래 우리 아파트가 있던 단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었는데, 일생 이 동네에 살았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낯선 곳이었다. 1층에는 곱창집과 전집이 밤낮없이 장사하고 2층에는 미스터리한 노작가의 서예 화실이 있는 낡고 더러운 상가 건물. 그 꼭대기에 마련된 공간이 우리의 방공호였다. 


참 특이한 집이었다. 집이 좁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애초에 집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그런지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구조였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쪽방만 한 방이 하나 있고,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복도를 나오면 안방과 부엌, 그리고 건넌방이 있는 구조인데, 이 좁은 공간에 어거지로 방을 세 개나 만든 것도 참 재주다 싶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집의 히트는 화장실이었다. 천장이 세모로 기울어진 조각난 공간에 세면대와 변기를 구겨 넣은 상태였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이 몸을 씻을 공간이 아니라 대걸레를 빠는 공간으로 만들었겠다 싶었다. 학교 때 지진이 나면 책상 아래로 숨으라고 배웠는데 키가 180cm나 되는 나는 씻으러 갈 때마다 마치 지진 대비 훈련을 하듯 몸을 실컷 굽혀야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무엇보다 이 화장실에서 나를 돌아버리게 했던 것은 눈물 나는 수압이었다. 워낙 노후화된 상가 건물이다 보니 우리가 사는 3층까지 웬만해선 수압이 올라오지 않았다. 세면대 물은 어찌어찌 나왔지만 샤워기 물은 아흔 살 먹은 할아버지의 오줌발처럼 감질나게 흘러 씻을 때마다 부아가 났다. 그나마 샤워가 가능할 정도의 수압을 끌어올리기까지는 물을 틀고 20분은 기다려야 했으니 내 몸뚱이 하나 씻는 데에 이토록 인내가 필요한지 그때 처음 배웠다.


나오라고 하는 곳의 물은 안 나오고, 나오지 말아야 할 곳의 물은 나오는 것이 이 집이 가진 고약한 점이었다. 장대비가 퍼붓던 어느 여름밤, 문간방에서 자던 동생이 거실로 나와 소리를 질렀다. 천장에서 빗물이 줄줄 새고 있었는데 어느새 창가 쪽으로 빗물이 꽤나 차올라 자칫하면 온 방 안이 비에 잠길 뻔한 것이다.  


집이 망하고도 부모한테 모진 소리 한번 한 적 없던 동생도 이게 뭐냐며 울고 불다 집을 뛰쳐나가고, 당황한 엄마 아빠는 비가 오는 걸 어쩌라는 거냐며 되려 어깃장을 놓고 빗물을 퍼내던, 한여름 밤의 물난리.


창문 너머로는 곱창집 간판 불빛이 커튼을 뚫고 들어와 밤잠을 이룰 수 없고, 늦은 밤 귀가할 때면 취객들이 건물 출입구에 노상방뇨하느라 내가 내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우리의 첫 번째 피난처. 그런데 이런 허름한 집도 주인이 되지 못하고 세입자로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대한민국 도처에 깔린 게 아파트고 빌라고 주택이지만 이제 세상 어디에도 우리 집은 없으니까. 우리 모두 이렇게 평생 누군가에게 월세만 바치고 살다 죽을지 모르지. 가족 누군가 로또 당첨이 되거나 연예인이 되어 뜨지 않는 이상 자가를 마련할 정도의 일확천금이 생길 리 없으니까. 


버스에 앉아 창문 너머 남의 아파트 베란다를 구경하며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인생이 따습고 윤택할까' 혼자 자격지심에 빠지기도 하고, 어린 마음에 가장 만만한 엄마에게 온갖 독한 소리로 원망을 게워내던 나의 스무 살은 참 쓰라렸다. 


그 후로 우리는 결국 난리통에 피난 다니듯 서울에서 더 멀고, 더 싼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다. 매달 가계 수입에서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월세였으니 전세 보증금을 모으거나 소액 적금을 드는 것은 사치요, 네 식구가 안 굶고 먹고살기에도 빠듯했다. 온 가족이 아무리 벌어봐야 월세살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마치 제자리에서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처럼 아무리 달려도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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