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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고 11년간 잠적했습니다

쫄딱 망하게 되면 인간관계에 대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내 주변을 채우던 그 많던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듯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 명뿐이거나 혹은, 아무도 다.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간다. 더 이상 인맥으로 두기엔 경제적 가치가 없어져 일 수도 있고 돈 빌려달라는 부탁을 듣게 될까 먼저 뒤돌아 섰는지도 모른다. 왕년에 아무리 잘 나가던 사람이라고 해도 망한 후 주변의 손절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중에는 망한 사정을 안타까워하며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세상인심 마냥 야박하다고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망한 자들은 사람들에게 손절당하기 전에 스스로 주변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다. 일시적으로 잠수를 타거나 아예 잠적하기도 한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과거와 달리 초라해진 모습을 주변에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나였다.


우리 집이 망했을 때 내 나이가 스무 살. 친구들은 대학 다니며 연애하기 바쁜 청춘이었다. 나는 대학  학기를 겨우 마치고 휴학계를 냈다. 사업을 말아먹은 아빠 대신 뒷수습을 하러 다녀야 했고 돈 벌러 다니기 급급했다.


사람들은 내가 여전히 팔자 좋은 유학생인 줄 알았다.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동안 그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과 내가 처한 현실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졌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우리 집이 풍비박산 났다고 말할  없었고, 비루한 현실을 각색해 잘 사는 척하기도 싫었다.


그렇게 나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공평하게 모두를 떠났다. 집이 망해서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다 보니 누가 나를 찾아올 수도 없었다. 스토커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주기적으로 전화번호를 바꾸고 사람들로부터 도망 다녔다.


대학, 군대, 직장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나는 결국 늘 도망치고 잠적했다. 그 사이 우울증은 중증으로 악화되어 툭하면 공황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대학병원 정신 병동에 입원할 정도가 되었다. 나 자신과도 전혀 잘 지내지 못하는 내가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사회성이 거세된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녔지만, 사람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외로움은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만 한번 잘못 쉬어도 삼켜온 눈물들이 꺽꺽 쏟아질 판이었다. 처절하게 외로웠지만 또 처절하게 혼자였다.


그래도 차마 내가 먼저 뒤돌아 선 인연들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잃고 정신마저 피폐해진 나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떠나온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그리운 이들을 SNS에서 몰래 뒤져보면서 '누구는 결혼을 했구나, 누구는 변호사가 되었구나' 축복과 시기를 보내며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 자신을 경멸했다.


그 사이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로지 악착같이 돈을 벌고, 우울증 약을 퍼먹으며, 공부만 했던 세월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황폐해진 삶을 도저히 복구할 수가 없었다.


11년 만에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늙은 신입을 채용해 주는 곳이 없어 우연히 방송일을 하게 되었고 생각지 못하게 직업이 되었다. 이름과 얼굴이 잘 팔려야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도망가려야 도망갈 수도 없다. 하루종일 핸드폰을 붙들고 섭외 연락을 기다리는데 연락처를 바꾸고 잠적하는 것은 스스로 밥줄을 끊고 아사(死)하겠다는 짓일 테니.


요원하던 졸업을 하고, 직업이 생기고, 아빠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의 회복을 경험하고 나니 그제야 내가 등졌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많이 미안했다. 전쟁 같은 11년을 살아내면서 나는 내 삶을 복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 주변 사람들에게는 지독한 회피형이자 이기주의자였다.


참 고맙고 미안한 것은, 내가 이토록 긴 세월 잠적하는 동안 끊임없이 나를 찾아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10년간의 추적 끝에 나를 결국 찾아낸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랬고, 3개월 같이 인턴 생활을 했을 뿐인데 9년 만에 나를 찾아낸 또 한 친구가 그랬다. 이제야 그간의 세월을 친구들에게 터놓고 나니 그들은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되려 자신들이 상처를 줘서 내가 떠난 줄로 자책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11년을 숨어 살았던 나는 죽도록 감추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를 이곳에서 글로 풀어내고 있다. 사이 내가 떼돈을 벌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과거를 무용담처럼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다. 삶의 전장()에서 쓰러지고, 주저앉고, 기어가다, 다시 일어나고, 걷고, 뛰고, 또 주저앉기를 반복하면서 회복하는 힘이 조금이나마 생겼기 때문이다.


더는 잠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꾼다. 언젠가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나 독자들 앞에서 당당히 이름과 얼굴을 내놓고 인사드리는 날이 올 수 있기를. 11년간 잠적을 하며 살아온 내가, 이제는 세상의 밝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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